그리고 뭔가...

신분상승의 사다리로서의 교육에 대한 보고서 평가 [펌]

가을강 2009. 12. 31. 11:32

KDI 보고서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

토익 만점을 받은 중학생의 예를 두고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 학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어설픈 의견을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걸 부정하든 긍정하든 현실은 현실이다. 한갓지게 ‘자녀 학력’이라고 했지만 기실 이 ‘학력’이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절대적 변수가 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 아침 <한겨레>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낸 보고서(‘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의 결론을 1면
기사로 전하고 있다. 좀 뒷북 치고 있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이미 우리 사회가 일찌감치 지적해 온 있는 ‘부와 가난의 대물림’에 관한 것이다.

KDI 누리집에 들어가 보니 예의 연구보고서가 목차, 요약, 원문(PDF) 등으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김희삼 부연구위원이다. ‘요약’된 내용을 새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나라의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은 국제적으로 보면 높은 수준이다.

- 그 비결은 고도성장 덕분에 상위직종의 일자리가 생겼고, 하층계급도 교육을 통해 이런 지위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앞으로는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교육정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효과적이다.

보고서는 ‘1998~2007년 추적 조사된 아버지와 성인 아들 447쌍의 임금·소득 정보를 활용해 경제력 대물림 정도를 분석’한 것이라 하니 매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체감’하는 세상과 그것은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 [요약]

□ 본 포럼은 「한국의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 분석」(정책연구시리즈 2009-03, 한국개발연구원, 2009. 12) 중 일부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임.

------------------------------------------------------------------------------------

□ 우리나라의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은 국제적 기준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평가됨.


현재 30대 중후반의 자녀와 그 부모 세대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영미권보다 북유럽과 유사한 수준.


소득 대물림도 심한 편이 아니며, 그 절반 정도는 부모 소득이 자녀의 교육에 대한 투자를 통해 자녀 소득에 영향을 주는 경로에 의해 설명할 수 있음.


□ 우리나라의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이 높았던 비결은, 고도성장과 산업구조의 급변으로 더 많은 상위 직종의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아도 교육을 통해 이런 일자리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다는 데 있음.


빈농이 다수였던 산업화 이전 세대보다 그 다음 세대에서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2·3차 산업에서 더 나은 취업기회가 양산되었음.


초·중·고등교육의 순차적인 보편화와 계층을 초월한 높은 교육열로 저학력 부모로부터도 고학력 자녀가 많이 나왔음.


□ 그러나 앞으로는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이 약화될 우려가 있음.


고도성장이 종료되고 잠재성장률이 하락했을 뿐 아니라 성장이 그만한 고용창출을 동반하지 않는 국면에 접어들면서 전체 일자리 수의 증가 자체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와 있음.


사교육시장의 심화에 따라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교육, 특히 교육의 질에 미치는 영향이 증가하여 고소득층 자녀의 명문대학 진학률이 상승하였음.


부모가 대체로 가난했던 이전 세대에 비해 다음 세대는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급등으로 물적 자본의 직접적인 증여나 상속을 통한 경제력 대물림도 더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음.


□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교육정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효과적임.


공적 장학금을 확충하여 저소득층 자녀가 교육을 받는 데 있어서의 경제적 장벽을 해소하고, 초·중등교육 단계의 계층 간, 지역 간 교육 격차를 줄이며, 유아교육 단계에서 경제적 이유로 재능이 사장되지 않도록 배려할 필요.


성인의 노동시장 성과의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보정하는 것보다 유소년의 교육환경의 격차를 선제적으로 줄이는 것은 ‘결과적 평등’보다 ‘기회의 균등’을 구현하려는 노력으로서 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상대적으로 용이한 개입 방식임. /김희삼(한국개발연구원)

-----------------------------------------------------------------------------------------------

대략 10여 년 전인 듯하다. 어느 날 우연히 MBC의 <PD수첩>을 보고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기억이 아련한데 내용은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의 성취동기’쯤이었던 것 같다. 제작진은 비슷한 규모의 강남·강북 학교를 대상으로 해서 아이들의 학습 경험과 성취동기를 조사했다.

10여 년 전, MBC <PD수첩>의 보고

대상이 된 강남의 초등 학생들의 경우 한 학급 학생 대부분이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강북의 초등학생들 중 ‘어학연수’ 경험을 묻는 PD의 질문에 손을 든 아이는 불과 두세 명에 그칠 뿐이었다.

‘장래 희망’을 묻는 PD의 질문에 대한 응답의 내용도 ‘질적으로’ 달랐다. 강북의 아이들은 수줍은 표정으로 ‘경찰’이나 ‘군인’, ‘선생님’과 ‘간호사’ 따위의 직업을 이야기했다. 거기 비기면 강남의 아이들은 무엇보다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아주 구체적인 상층계급의 직업군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말한 장래 희망대로 ‘소아과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변호사’가 너끈히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그램의 말미에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전하던 PD의 우울한 목소리에 겹쳐서 나는 저 1960년대 후반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중졸 학력의 고향선배를 기억했다. 삼십대의 뒤늦은 나이였지만 사시합격으로 성공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그의 출세담은 오래 고향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계층 간 경제적 이동성’이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정도’라고 풀 수 있겠다. 보고서는 현재 30대 중후반 세대까지는 그 가능성이 높았지만 앞으로 이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는 우울한 전망을 전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체감으로는 이미 그 가능성이 반 토막이 난 지 꽤 오래되지 않았나 싶다.

그나마 그 계층상승의 사다리 노릇을 해 준 게 교육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육은 한때 ‘결혼’이나 ‘부’와 함께 계층상승의 가장 강력한 기제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교육이 성적을 가르게 된 오늘날 더 이상 ‘교육’은 사다리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이 그것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교육정책’에 초점을 맞추라는 보고서의 결론은, 그래서 어쩐지 공허해 보인다. 그 결론의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현실은 거의 정반대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열풍, 일제고사, 성적공개, 입학사정관제, 특성화고 확대 등 현 정부가 시행 중이거나 시행하려고 하는 모든 제도는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는 쪽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가는 교육정책, 사다리 따윈 필요없다?

기초생활 수급 대학 신입생들이 지원 받던 무상장학금이 없어지고 성적에 따라 생활비를 지원한다는 보도에 이어 떠오르는 것은 그들 ‘저학력’의 책임을 그들 자신에게의 물을 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의 확인이다.

우리 지역은 아직도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발시험을 치르지 않을 뿐, 모두 내신 성적으로 진학한다. 자연 아이들은 성적순에 따라 줄을 서서 성적으로 서열화되어 있는 고교로 진학하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시내의 여학교 중에서 가장 학력 수준이 높다. 한번도 유의하지 않았는데 우리 학생들 중에 기초생활 수급권자의 자녀는 학년 당 1~2명이다. 나는 그게 아이들의 학력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시내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진학하는 한 여학교에는 학년 당 20%가 넘는 아이들이 기초생활 수급자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 못한다고 구박만 받으며 자란 아이들, 결국 그들이 겪었던 ‘가난’과 ‘소외’가 ‘저학력’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10여 년 전에 나는 한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위 사실을 전해 듣고 나는 잠깐 동안 씁쓸해 했을 뿐이었다. 어느 새 우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이 엄청난 양극화의 현실을 현실로서 추인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여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공부는 못했지만 마음씨 여린 여자아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얼굴을 붉히는 대신 일간지를 덮고 말았다.

<2009.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