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약자 무시의 위험한 정신세계>

그리고 뭔가... 2021. 9. 27. 10:06

'약자 무시'의 위험한 정신세계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김종구 (언론인)  |  기사입력 2021.09.27. 07:39:41

법학은 보통 사회과학으로 분류되지만 그 뿌리는 인문학에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분화가 본격화한 20세기 이전에 '지식인'은 인문학적 통합적 지식의 소유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법의 영원한 주제인 '정의'는 철학, 문학 등 인문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법과 문학 운동'은 법의 인문학 전통을 부활하자는 운동이었다. 미국 '증거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헨리 위그모어는 "모든 법률가가 숙지해야 할 문학작품 100권의 리스트"를 발표하면서 "법률가는 자신이 담당한 사안이 일반적 사상과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숙지해야 할 특별한 직업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법과 인문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은 헌법이다. 헌법에는 역사와 철학을 비롯해 인류 정신과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응축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에서 시작해 '신체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인권' '행복 추구' 등 각 헌법 조문을 구성하는 핵심 사상에는 인문학 고전의 숨결이 녹아 있다. 우리 헌법의 인문학적 뿌리를 탐색한 <헌법의 발견>의 저자 박홍순씨는 헌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인문학 필독서로 플라톤의 <법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존 롤스의 <만민법> 등 7권을 추천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3일 안동대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조선 성리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의 고향에서 '인문학 경시' 발언을 한 무신경도 놀랍지만, 평생 법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온 그의 정신세계가 고작 그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현대사회는 과거의 법학 지식이나 법기술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어 인문학적 탐구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의, 인권, 평등, 인간의 존재 가치 등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없는 법 운용은 한낱 기계적 장치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기계다. 

우리나라에는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인문학법)이 있다. 기초학문인 인문학이 실용학문에 밀려 점차 대학과 사회에서 찬밥신세가 된 상황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이 법은 인문학의 진흥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여러 책무와 역할을 명시하고 있다. 나라의 지도자가 학술, 문화, 예술 등 모든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식은 갖춰야 한다. 그런데 윤 전 총장은 '인문학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높은 자리 윗분이 인문학을 경시하면 교육당국과 대학들도 덩달아 영향을 받아 인문학의 고사는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풍토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윤 전 총장의 이 발언을 접하면서 맨처음 떠오른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등을 향해 "거지소굴(shithole)"이라고 한 발언이었다. 윤 전 총장의 발언은 트럼프의 극단적 막말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 속에 흐르는 우월감, 인종적 편견, 못 사는 나라에 대한 경멸 등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과연 아프리카는 손발 노동이나 하는 수준인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펴낸 자료를 보면, 아프리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모바일 금융, 전자상거래, OTT 서비스 시장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있다. 디지털 선도국인 나이지리아, 남아공, 케냐 등에서는 핀테크, 교육, 전자상거래, 농업 등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스타트업이 많이 생겨나면서 스타트업이 2019년에 받은 벤처캐피털 투자 총액이 약 13억~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가나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토지등록제 시행을 준비하는 등 정부 서비스에 블록체인을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쯤 되면 아프리카가 손발 노동이나 하는 곳으로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와 편견의 소치인지 알 수 있다. 자칫 '글로벌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아프리카는 오히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목도 많다. 성 소수자 차별 금지를 헌법에 가장 먼저 명시한 국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남아공은 성별과 장애를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금지하고 있다.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자유지수'에서 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와 모리셔스는 자유와 민주주의 순위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다. 전 세계 국가들이 난민수용을 꺼리는 상황에서 우간다 정부는 남수단 난민 100만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난민 이동의 자유, 경작지 제공, 공공서비스 이용 허용 등 획기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난민에 대한 불관용과 편견이 만연한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치 지도자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쓸데없는 우월감이나 교만함이다. 타자에 대한 존중, 이해, 배려의 정신은 나라 안은 물론 밖을 향해서도 발휘돼야 한다. 

잦은 말실수는 단순히 한순간의 착각이나 생각의 회로가 꼬인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 수준과 사고의 민낯이며, 확신과 신념의 다른 표현이다. 주목할 점은 윤 총장의 말실수에서는 일관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약자에 대한 경멸과 무시다. '고발청부' 의혹과 관련한 소규모 언론사 무시 발언을 비롯해 '120시간 근무', '부정식품' 발언에다 최근의 인문학과 아프리카 발언에 이르기까지 약자 무시가 학문과 글로벌 차원까지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는 정권의 향배와 관련 없이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지상과제다.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정글에서 벗어나 힘없는 계층과 소수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일은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아도 내릴 수 없는 깃발이다. 그런데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가 전방위적으로 약자를 무시하고 기득권층과 강자 쪽 사고에만 젖어있으니 참으로 우려스럽다.


[출처: 2021.9.27 프레시안]

비정 카이스트 총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사람들의 야만![펌]

그리고 뭔가... 2011. 4. 11. 13:16

카이스트에서 올해에만 학생 네 명과 교수 한 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자살귀신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집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고 카이스트에 입학한 것을 행복해 했을까?

그 아이들이 거기를 안 들어갔으면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과연 '입학 행복'감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조중동과 서남표 총장은 '해외 일류 명문대에서도 자살자는 많다' 라고 요설을 되풀이 하여, 자살이란 어쩔 수 없는 관례임을 떠들지만 '자살'을 일반화 시키는원초적인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다.

대학을 죽기 살기의 서바이벌 현장으로 만들어 놓고 살아남는 자를 이 사회의 엘리트로 키운다는 것인데, 참으로 이런 엘리트에 의해 리드되는 우리나라 사회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하다.

자살자를 낙오자로 낙인찍는다면 경쟁의 굿판에서 살아남아 등록금을 벌금으로 내거나 중도에 학업으 포기하는 것은 삼류 낙오자인가?

경쟁지상주의가 나라와 사회 발전의 첩경일까?

그런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경쟁력은 정당한 것일까?

장관 후보자들이 떡 먹듯이 저지른 불법 비리, 병역기피와 면제 같은 것들도 그들이 인정하는 경쟁력일진대 과연 얼마나 정당한가?

언론사의 사주와 간부의가족들의 병역면제율은 타 직종보다도 더 높다하지 않던가?

'자살'은 낙오자의 비겁한 선택이며 많은 사람들이 멀쩡하다고 입에 거품물고 떠드는자들은 정말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엘리트에 의해 끌려가는 나라는 더욱 삭막하다.

그것은 결코행복한 나라,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서남표는 어떻게 카이스트를 좀 먹었나?

[공작의 꼬리 경쟁·11] 차등화 보상 동기와 근원적 동기

차등화 보상 동기와 근원적 동기

차등화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등적 금전적 보상을 통하여 일의 동기 제공을 해야 한다고 한다. 업무 실적이 좋으면 월급을 올리거나 진급을 시키고, 나쁘면 급여를 깎거나 심지어 퇴직을 시키는 당근과 채찍을 들 수 있다. 당근과 채찍은 보상 동기 제공이라는 점에는모두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당근과 채찍에 심리적으로 달리 반응하는 자세한 면은 무시하기로 한다. 어떤 경우에는 당근이, 어떤 경우에는 채찍이 더 효과가 있다. 예를 들면, ①어떤 임무를 수행 하면 급여를 올려주는 당근 제공과 ②급여를 미리 올려주고, 그 임무를 수행 하지 못하면 다시 급여를 회수하는 채찍 정책을 비교 할 수 있다. ①과 ②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②의 경우가 더 열심히 해서 임무를 달성하려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예로, 어떤 실험에서 실험 대상들에게 어떤 물건(커피 잔)에 대해 얼마나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를 물었다. 평균 5달러라고 답변했다고 하자. 그 다음 실험에서는 커피 잔을 그들에게 주고, 얼마에 그 잔을 팔 용의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평균 가격이 5달러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자신이 이미 소유한 것과 앞으로 소유할 것에 대하여 심리적 가치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아예 직장을 잃은 사람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현재는 보상 동기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특히현대 경제는 보상 동기에 의해 움직이며, 교육이나문화 등사회 전체에 이 보상 동기의 영향이 깊숙이 퍼져있다. 다니엘 핑크는 보상 동기에 의문을 던지고, 인간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동기인 근원적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의 채찍과 당근은 과연 교수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프레시안(허환주)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제1 동기 :음식이나 물에 대한 욕구, 또는 성적인 신체적 욕구 같은 것들.
제2 동기 : 보상 동기. 어떤 행위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나 그 반대인 벌이 주어졌을 때, 보상을 받거나 벌을 회피하기 위한 동기.

근원적 동기는 우리의 본능적 욕구의 제1 동기나 보상 동기로 인한 제2 동기와는 다른 우리가 행위 자체로부터 얻는 것이라고 하며 제3 동기라고 한다. 이 동기는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서 또는 벌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보수와 관계없이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그림을 그린다던가, 수수께끼를 푼다거나, 어떤 연구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들이 이에 속한다.

오랫동안 제1 동기와 제2 동기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근원적 동기는 무시되었다. 그런데 1940년경 미국의위스콘신 대학의 심리학자인 해리 하로우는 원숭이들로 하여금 어떤 간단한 작동을 하는 실험을 했다.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경우와 마른 포도의 보상을 주는 두 경우에 원숭이들이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가를 관찰했다. 놀랍게도 마른 포도의 보상을 주는 실험에서 원숭이들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실수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로우는 보상이 있을 때 하는 행위와 보상이 없을 때 하는 행위에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했으며,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이 제3의 동기를 "행위 자체의 보상"이라고 했다. 이 제3의 동기는 심리학계에서 별로 크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1969년 카네기 멜론 대학의 데시라는 심리학 박사 과정 학생이 하로우와 유사한 실험을 통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데시는 두 집단의 대학생들에게조각 맞추기 작업을 하게 한다. 그 실험은 3일에 걸쳐 아래 있는 표에 따라 실행했다. 집단 A와 집단 B, 두 집단에게 조각을 주고 특정한 모양이 되도록 맞추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조각들을 맞추는 과정 중에 약 8분 동안의휴식을 갖게 하는데, 아래 표는 이 휴식 기간에 두 집단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한 결과이다.

첫날에는 집단 A와 B는 조각들을 맞추는 작업에 대한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았다. 8분 동안의 휴식 시간에 몰래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무런 보상이 없었지만 이 두 집단은 휴식 중 모두 평균 약 3분 45초 정도의 조각들을 맞추어보려는 시도를 했다.

둘째 날에는 집단 A는 조각을 주어진 모양으로 맞추면 일정액의 돈을 지급하고, 집단 B는 첫날처럼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집단 A는 첫날보다 훨씬 많은 시간인 8분 중 약 5분 동안 맞추려 시도를 한다. 이는 제2 동기에서 말하듯이 금전적 보상이 집단 A의 학생들에게 조각 맞추는 일에 더 많은 흥미를 보이고, 또 실제로 더 많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상이 없는 집단 B는 전날과 비슷한 시간을 조각 맞추는 데 할애한다.

셋째 날에는 두 집단 모두 보상을 주지 않는다. 집단 B는 전날보다 약간 더 많은 시간을 조각 맞추는 데 보낸다. 그리고 집단 A의 경우 조각 맞추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 8분 중 단지 3분 정도만 시도를 한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금전적 보상이 주어진 집단 A의 학생들은 조각 맞추기 자체가 갖는 근원적 흥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둘째 날 더 적극적으로 조각 맞추기를 한 것은 금전적 보상 때문이고, 이런 보상 경험이 조각 맞추기라는 것 자체로부터 얻는 흥미를 사라지게 했으며 근원적 동기의 저하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데시의 실험에서 나타난 보상동기에 의한 근원적 동기의 저하는 어린이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을 레퍼, 그린 그리고 니스벳이란 세 심리학자의 다음과 같은 실험이 보여준다.

이들은 어린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집단 A의 어린이들에게는 그림을 그리면 상을 줄 테니 그림을 그리겠는가 물어보고 나서 그림을 그리게 했고, 집단 B와 C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그 어린이들이 그림 그리기를 끝냈을 때, 집단 A의 어린이들에게 약속한 대로 상을 주었다.

집단 B의 어린이들에게도 그림을 그린 후에 예기치 않은 상을 주었다. 집단 C의 어린이들은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 뒤에 아이들에게 그림 도구를 주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게 했으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집단 A의 아이들은 집단 B와 C의 아이들에 비해 그림 그리기에 현저하게 낮은 흥미를 보이고, 또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데 적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집단 A의 어린이들의 행위는조건부 보상의 부정적인 면을 잘 보여준다. 보상 동기가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그림의 자체적 흥미를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보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일하는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상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동기 부여가 된 경우에는 어떤 행위나 활동에 대한 그들 자신 고유의 동기, 즉 근원적 동기가 약화된다.

이러한 실험들에서 유추되는 재미있는 현상은 보상 동기와 근원적 동기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 근원적 동기의 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보상 동기는 결과에 의존하고 일의 과정이 무시된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생기는 만족 역시 무시된다. 예를 들면 등산이 좋아서 산에 가는 경우는 산행을 하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최초 14좌 등정과 같은 타이틀을 따기 위한 경쟁에서는 그 결과에 따른 보상 동기에 의한 등산이 된다. 결과에 따른 보상이 강조되고 그 행위 자체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경시되어, 등산이라는 행위는 빨리 끝내야 하며 보상이 요구되는 고통이 될 것이다.

"해야 되는 걸 하는 것이 일이고, 안 해도 되는 걸 하는 것은 놀이다"라고 미국의 소설가마크 트웨인이 말했다. 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서 근원적 동기와 보상 동기의 대비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어느 날 톰은 담장에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물론 그는 그 일을 하기 싫었으며,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친구들에게 페인트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떠벌리고, 친구들은 그 페인트칠을 하게 해달라고 톰에게 구걸하게 된다. 그래서 친구들은 재미있게 페인트칠을 하게 되고, 톰은 하기 싫은 일을 쉽게 끝마치게 된다. 톰 소여에게 페인트칠은 안 하면 벌을 받게 되는 보상 동기에 의한 것이고 그 친구들에게 페인트칠은 근원적 동기 즉 재미에 의한 것이다.

금전적 보상이 근원적 동기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연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가 금전적 보수나 그 반대로 실업과 같은 벌에 의한 보상 동기가 강화될수록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근원적 동기를 잃어,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보상이나 벌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서 일이나 행위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감소하거나 사라지고, 오히려 고통이 늘어나며, 그 고통의 보상으로 금전적 보수가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원적 동기의 중요성은 단지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뿐만이 아니다. 많은 미술, 음악,문학 등의ㅇ
예술 작품, 위대한 과학의 업적, 새로운 기술 개발, 의학의 발전 등등은 근원적 동기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근원적 동기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로 <위키피디아>를 들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09년에 16년 동안이나 시장에서 판매해왔던백과사전 <엔카르타>의 생산을 중단한다. 그 이유는 <위키피디아>라는인터넷 백과사전 때문이다.

이 사전은 누가 돈을 줘서 만든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그 정보를 파는 것도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참여해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급여가 그 사전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동기가 아니며, 그저 각 개개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닌 금전적 동기 부여가 제공되지 않는데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백과사전을 누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독보적 사전이 되었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나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은 보상 동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돈으로 환산된 가치를위하여 작품을 만들거나 연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갖는 근원적인 동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독일의홈불트 대학을 세운 철학자 훔볼트는 인간은 시장과 같은 외부적 제약들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창조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했으며, 이것을 인간의기본 본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생각해 보자. 그가 외부에서 주는 금전적 보상 때문에 그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가 하는 일은 존경할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멸시한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의 창조성을 표현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니까."

/서상철 캐나다 윈저 대학 교수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2011.4.12>

[펌] 일본을 잊을 수 없는 이유- 삼일절에 온 멜 사진 중에서...

그리고 뭔가... 2011. 3. 2. 14:38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새삼 떠 오르는 사진들로 채워진 메일이 삼일절에 왔다.

일흔이 훨씬 넘으신지금까지 패러글라이드와 가파른 등산을 하시는 어르신이다.

젊어서는 군악대 생활를 하신 분으로 컴퓨터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신다.

이 분이 삼일절에 일본군의 만행 사진을 보내 주셨는데 정말로 끔찍하도록 잔인하고 분통 터지는 사진을 모아 놓은 파일이다.

일본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는 이야기나,

과거를 잊고 이제 새로운 한일 관계를 정립하자거나,

일본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진들이 아닐 수 없다.

목을 치는 놈, 작두를 밟는 놈, 총을 쏘는 놈, 칼을 쑤셔대는 놈, 여자들의 음부를 잔인하게 짓밟고 능욕하는 놈, 인체 실험을 하는 놈들이 별 다른 놈이랴?

다 애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동생이고 형이 아니랴.

집에 들어가면 가족과 웃고 울며 먹고 마시는 존재 아니랴.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로 생긴 감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되어 북한 적대를앞세워 행해진 수 많은 고문과 야만을 행한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어깨를 한 바퀴 돌려 어깨 뽑기 고문을 당했다는 사람들, 온 몸이 피투성이로 구타하고,성기에 대한 전기 고문, 물고문에 대한 고발 사례 여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를 행한 이들도 역시 한 가정의 가자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자식이었다.

일본에 저항하는 조선인이나, 평범한 조선 민중은 아무렇게나 죽이거나 괴롭혀도 된다는 사고나,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은 빨갱이로 몰아서 갖은 못 된 짓을 해도 된다는 생각이 뭐가 다르랴.

그들은 반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진딧물이나 파리, 개미들을 아무 생각없이 막 죽여대듯이 죽였다.

일본에 대해서는이성과 논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그저 감정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진실이 있다.

<2011.3.2>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악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칼이 지나가 목이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잘려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져 있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

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잘려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

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리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목을 베어 놓고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7.28 재보선 결과를 보고.

그리고 뭔가... 2010. 7. 29. 16:32

한나라당이 5:3으로 이겼다. 민주당이 3:5 로 졌다.

인천과 서울 은평에서 민주당이 짐으로 하여 강원에서 두 곳을 이긴 것이 빛이 바래 버리고 말았다.

나는 민주당이 이번 재보선에서 깨진 것은 광주를 타당에 뺏기지 않으려는속좁고 비뚤어진 생각때문이라고 본다.

듣자니 광주에서는 시민단체들이 민노당 후보를 시민후보로 밀었고, 여러 여론 조사에서는 이 사람이 앞서기도 했다고 한다.

야권 단일화란 자기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양보하는 데서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이지 지키려고 집착하면 뻔할 뻔자이다.

광주를 양보했더라면 은평과 인천에서, 그리고 충주에서 그렇게 패배하지는 않았으리라.

대의를 만들어서 내세워 그 바람을 다른 곳까지 파급시켜야 하는 것인데 대의란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그나마 은평에선 투표일 이틀 전에야 억지춘향으로 몰리다가 비리 투성이 의혹으로 국무총리 청문회에서 거부된 할머니를 공천하였으니 국민들이 저희들이 따르라고 한다고 무조건 따라가는 멍충이들이 아닌 바에야 묻지마 기표를 하겠는가?

은평으로 집중된 전국적인 관심과 기대를 멋지게 성공시키고 광주에서 민주당이 양보를 하였다면 그 여파가 게양으로, 충주로, 강원도로 순식간에 큰 바람을 형성하여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본다.

6.2 선거 때 유시민 한명숙이가 결과적으로 패배는 하였지만 그 희망과 심판의 바람이 전국적으로 퍼져 김두관 이광재 안희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엔 민주당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한 오판이 작은 총선을 망치게 된 것이다.

특히 송영길의 지역구에서도 깨진 것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보편적인 민주당 심판 정서에 힘입은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대통령과 영부인까지 인용한 강용석의 성희롱에 대해 빠르고 단호한 징계절차를 밟음으로써 국민공분을 따랐지만 민주당은 누드사진 강권으로 지탄받는 군수를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국민정서에 거역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민주당의 소탐대실의 우매로 결론난 선거라고 볼 수 밖에 없지만 소탐의 열매인 광주 수성의 댓가를 치룬 것이라고 본다.

역시 민주당은 경상도의 한나라당에 불과하다.

이번 선거의 결과에서 얻은 겸손과 실천(사대강 천안함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한 실천, 그리고 성희롱 군수에 대한 미징계)

을 민주당에 앞으로도 계속 외면하면 더 큰 실패를 겪고 말 것이다.

<201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