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감성과 추억 만들기

기본카테고리 2006. 2. 7. 12:37

< 이미연연가2-3.추억만들기[김현식] >

한 20 여 년 전 쯤에 막내 처남의 군대 면회를 갔었다.

면회소에서 처남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따가운 햇볕이 쪼이는 운동장에서

너댓 살 먹은 남자아이가 돌 몇 개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굴리기도 부딪치기도 모으기도 흐트리기도 하면서...

아마 소리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땅위를굴리다 돌을 맞출 때 나는 소리,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들도...

아이는 이것에 열중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한참을 논다.

흙을 모아 쌓고 무너뜨리는 일, 손에 흙을 묻혀 가면서 떨어지는 먼지마저 재미있기도 한데

돌을 갖고 노는 일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아내에게 그 아이를 가리키며 "참 잘 놀지? 그까짓 돌 몇 개 가지고서..."

아내도 참 신기해 하였다.

어릴 때는 좋은 줄도 모르고 그냥 마냥 즐거워서 그 시간을 마주하고 같이한다.

사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느끼려면 조금은 나이를 먹어야 한다.

자랄 적의 예쁜 고향 정경들을 그 때에는 어찌 알까?

지나고 나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 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인가?

세상에 동화되지 않았을시절에 대한 동경때문인가?

감성이 깨는것은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뭔가 자기의 안에 깨일 만한 여지가 있어 그것에 반응하면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 여지란 경험- 직접경험이건 간접경험이건 간에-에 많이 기인하지 않을까?

사실 예술 천재들은 아마 경험 없이 저절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조금은 나이를 먹고 생각도 많이하고 사람을 많이 겪고, 살아 봐야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연애 우정 평범한 사귐일지라도 사람의 감성을 잘 깨워 주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사람의 넓은 부분에 깔려 있을 때,

어떤 자극이 들어 오면 반응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엔 그냥 좋아서 즐길 수 있지만

좀 커서는 보아서 들어서 맡아서 맛 봐서 좋다고 느낀다.

이것이 극대화 최다량화 할 때에는 중년 전이라고 여겨 진다.

그 이후엔 무뎌져서 시큰둥하고 밋밋하고 심심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심심할 때가 많아진다는 것, 별 것 아닌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늙어가는 과정이다.

2-30 대엔 눈과 귀에 들어오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즉각즉각 좋다고 느껴졌지만, 나이 먹으면 그게 그건데 뭐 그리 새삼스럽겠는가?

그러나 문득문득 깨이는 감성이 있다.

지난 일요일에도 그랬다.

장인 성묘 길에 공릉 하니랜드 옆의 저수지를 지나는데 요 며칠 강추위가 몰아 닥치더니꽝꽝 얼어서 운동장이

되었다.

나는 언 강과 저수지를 걷고 미끄름 타면서건너는 것을 참 좋아한다.

몇 년 전에도 조각하는 친구와 함께 분원리 앞 한강에서 팔당 쪽으로건너 갔다 오기도 하였는데

그 때 강 가운데의 작은 섬과 갈대 부들이 그렇게 예뻤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데 나도 한강을 걸어서 건넜던 것이다.

싫다는 아내를 재촉하여 얼음판을 디뎠다.

첨엔 조심조심 걷다가 꽝꽝 발을 굴러 보고 얼음 낚시하는 가족들을 보고는 안심하고

마음 놓고 지치기 시작한다.

쭉쭉 미끄럼을 타기도 한다.

파르스름한 얼음판은 하늘이 비친 채로 얼어 붙은 것일까?

하늘 한 번 보고 얼음판 한 번 보고 하면서 얼음을 즐긴다.

롱 스케이트를 타고 쫙쫙 지쳐보고 싶다.

얼마나 신날까?

아내와 반대쪽 강가에 까지 걸어 갔다가 다시 돌아 온다.

아내에게 "얼마나 멋있어, 참 좋지?" 하니 바로 "맞어" 한다.

매점에서 사발면 하나를 사서 스프를 반만 넣었다.

적당히 차고 맑은 날에 차디찬 얼음판 위에서 라면을 먹으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하면서

아내와 같이 낚시 좌대 앵글 틀에 앉아 먹기 시작한다.

라면은 스프를 반만 넣으면 국물이 아주 시원해진다.

아내도 사발면 뚜껑을 네 등분으로 접어 담아서 맛있게 먹는다.

후루룩 후루룩 거리면서...

내가 아내에게 이야기 하였다.

"나이 먹어서는 옛날 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하지 않아서 전보다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러니 추억만들기라도 자주 하여 나중에 우리가 더 나이 먹어서 이 때를 생각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

"맞어, 당신 말이 맞어"

그렇다.

나이 먹을수록 의식적으로 '추억 만들기' 를 많이 하여야 한다.

더 늙어서 지나 온 것들이 가슴 아플지 몰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낳지 않을까?

추억 만들기는 미래에 재현하기 위해서우리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축하기 아닐까?

시간 가는 것이 너무 빠르다고 느낄 때, 나이 먹는 것이 두렵고 싫어질 때,

나의 존재론적 회의 비슷한 것이 들 때 이런 추억 꺼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그날 추억을 일부러라도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20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