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란을 둘러 싼 파시즘 유사 파시즘 논쟁-펌

기본카테고리 2006. 1. 16. 18:31

황우석 사태를 둘러 싼 파시즘 논쟁

- 서프라이즈의 김동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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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파시즘이다


반전이 거듭되어 황까도 황빠도 한 번씩 좋은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난 바.. 황우석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을 지적함이 틀린건 아니지만.. 황우석에 대한 비판은 비판대로 의미있지만.

황우석이 잘못했다 해서 국민을 두들겨 패고, 황우석이 잘못했다 해서 국민을 가르치려 들고, 건수 잡았다는 식으로 기어올라서 기어이 대중 위에 군림하려 들고.. 유사 파시즘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지네들이 파시즘적 작태를 보여준 언론들은 분명 틀렸다.


히틀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태인의 세계정복계획을 주장했다.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하기도 했다.

“늑대가 온다.”

이 한방으로 히틀러는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귀축미영(鬼畜米英)이 아세아를 삼키려 한다.’ 이 한 방으로 일제는 하룻밤 사이에 많은 독립지사를 친일파로 바꿔놓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 ‘김일성이 남침한다.’ 김일성도 마찬가지.. ‘미제가 북침한다.’

무엇인가?

정보를 차단하고 대중의 공포심을 조성하여 대중을 통제하려는 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밑바닥에는 정보의 차단과 조작 및 대중의 통제라는 본질이 숨어 있는 것이다.


누가 파시스트인가? 정보를 차단하려는 자가 파시스트다. 정보를 조작하는 드는 자가 파시스트다. 정보권력을 장악하고 정보를 통제하려 드는 자가 파시스트다. 누가 그런 짓을 자행하는가? 지금 언론이 자행하고 있다.


대중은 정보를 차단할 힘이 없다. 대중은 정보를 조작하고 통제할 힘이 없다. 그러므로 대중은 파시즘을 자행할 능력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배후에서 속삭이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언론이 나팔수 역할을 하지 않은 파시즘이 역사 이래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파시즘은 세상에 없다. 생사람을 죽이겠다는 것이 파시즘이다. 지금 누가 파시즘적 작태를 보이고 있는가? 언제나 파시즘은 대중의 공포심을 이용했다.


‘재앙이 온다’고 떠드는 인간들이 누구인가? 생명과학이 인류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그들이 유사 파시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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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는 서프라이즈의 본질가치를 지켰고 핵심역량을 키워왔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은 지금 진정한 대안언론이 아니라 조중동 옆에서 구색을 맞추는 틈새언론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시민기자 제를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본질가치를 훼손했다. 네티즌과의 쌍방향 의사소통을 포기함으로써 핵심역량을 상실했다. 이제 그들은 전적으로 직업 기자들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본질에서 조중동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


네티즌들의 게시판 제보에 기대지 않아도.. 독자적인 취재망으로 언제든지 고급정보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마디로 ‘많이 컸다’ 이거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지식계급의 동아리 안에서 아류 조중동이 되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공동체에 동기를 부여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시대정신과 대화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시대정신과 대화하여 그 시대의 성공모델을 제안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혁명도 말하자면 하나의 ‘그 시대의 성공모델’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레닌모델, 모택동 모델, 체 게바라 모델이 있을 뿐이며 그 모델들은 20세기라는 그 시대의 성공모델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촛불은 가고 소금만 남은 오마이뉴스

언론의 촛불이면서 소금이어야 했다. 공동체에 동기를 부여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시대의 성공모델을 밝히는 것이 언론에 주어진 촛불의 역할이다. 권력을 감시함은 소금의 역할이라 하겠다.

오마이들은 스스로 촛불을 꺼버렸다. 그 작은 하나의 촛불이 민중의 욕망을 불을 질러 요원의 들불을 일으킬까 두려워 한 때문이다. 그 결과로 소금만 남았다. 소금 뿌리기가 그들의 사명으로 되었다.


알아야 한다. 인터넷의 쌍방향성 덕분에 많은 것이 이제는 환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언론은 과거의 언론이 아니어야 한다. 시대의 목탁과 소금으로 언론의 역할을 한정하는 것은 조중동이 발호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정부의 역할이 커지듯이 변화된 환경에 걸맞게 언론의 역할 또한 커져야 한다. 스스로 역할을 포기하고 소금 역할에나 안주하겠다면 퇴행이다. 그런 식으로는 도태되고 만다.

세상이 바뀐 만큼 언론의 개념부터 바꾸어야 한다.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공동체에 동기를 부여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시대의 성공모델을 밝히는 방법으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대중 위에 군림해서 안 되고 오직 대중일반과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만이 가능하다. 오마이뉴스여! 조중동을 비판하면서도 조중동이 부러웠더란 말인가?

<2006.1.16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