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달러 베이비를 보고서...

흔한 생각과 취미 2005. 4. 13. 18:49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는 게 고통일 뿐 이다.

끝장내 주세요.

거절하니 혀를 두 번 깨물어 자살을 시도 한다.

결국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도 반송된 것을 보고는

매기에게 모크슈라의 뜻을 알려 주고 키스한다.

그리고 생명 유지 장치를 떼고 진정제를 주사 한다.

"모크슈라는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 이라며...

"나의 소중한 혈육" 으로 가르치고 돌봐 주고, "자기 보호" 를 그렇게

강조한 셈이다.

또, 모크슈라 이기 때문에 죽음을 선사 한다는 의미일까?

나는 여기서 예수가 숨 넘어갈 때 한 마지막 말,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가 생각난다.

사랑이란 단어가 거의 쓰이지 않는 영화가 또 있었을까?

"섹스"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 미국 영화가 얼마나 될까?

아니 전 세계를 통털어서 얼마나 될까?

스토리가 진행되면 될 수록 잠이 깼다.

환절기 불면 습관으로 인한 눈 뻑뻑함을 달래려 왔지만, 점점 더 따가워 졌다.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호기심과 기대로 잠이 달아난다.

70이 넘었을 듯한 할아버지

이제 서른 초반의 여자 복서....

이 영화에서 "남녀 간사랑" 은 상상되는 것 조차 불안할 정도로 "욕구"가 없다.

그러나 "부녀 간 같은 사랑", " 좋은 친구" 라는 울타리로 넣기는 뭔가 싱겁다.

그래서 나는 부녀 보다도 더 진하고, 친구 보다 더 깊은 이성 간의 사랑을

그리려 한 것 아닐까 라는 고급스러운 생각에 흥분하게 되었다.

즉, "새로운 형태의 사랑" 을 제기한,

굉장히 뛰어난 영화를 보는 것인가 라는 기대가 크게 들었다.

어쩌면, 상대의 존재 자체만으로 기쁘고 편하고 행복한, 더 할 나위도 없이 좋은 것,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랑,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랑,

그냥 "있기만 한 것" 으로 모든 것이 다 좋은, 다 해결되는 형태를 그렸나.....

나름대로 "기대하는 결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기 호흡이 불가능한 전신불수의 매기가 다리를 절단하고 나서는

프랭키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할 때 부터 나는 이제 속는 일만 남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 하였다.

프랭키가 23년 동안 주일 마다 빠지지 않은 성당의 신부하고의 대화...

그냥 흔하디 흔한 "안락사 논쟁" 과 "제공자의 고뇌" 로 가고 말았다.

결국 "안락사 긍정" 쪽으로 귀결 되는 그런 영화가 되고 말았다.

너무 사랑하기에 죽이고 마는 안락사 영화......

프랭키에 대한 책임 추궁, 수사 등에 대한 후일담은 하나도 없이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남으로써 "안락사 제공자" 도 긍정하는 것 같다.

"사라짐"은 또 하나의 "죽음" 아닌가.

"죽임으로써" "죽는"..........

새로운 화두가 주어졌었지만 "안락사 논쟁"으로 끌려 간 듯 하여 너무 허전하다.

내가 속물이라서 그런가.....

금강산 가는 길 풍경

흔한 생각과 취미 2005. 4. 13. 18:42

나는 31일-2일의 2박 3일 간 육로로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상팔담 구룡연, 귀면암 삼선암을 구경하였지요.
해금강에서 해맞이를 했구요.
어디를 가든 우리 땅은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빼어나니까
경치 형용과 보고는 안 하겠습니다.
2박 3일 간 머물고, 들어 갔다 나오는 과정은 참 복잡하고 피곤하였습니다.

한밤중에 북의 경계 안에 들어가 한낮에 이동하고 나왔으니
금강산 근방의 풍경은 제대로 목격하고 온 셈입니다.
한 마디로 색이 참으로 건조하다는 느낌입니다.
잿빛과 갈색의 이미지가 겹쳐 있는 느낌이지요.
육로관광을 위한 도로와 동해남부선 철도 공사가 한창인지라
차가 다니면 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도로 주변의 야산 자락들은 나무를 베어 버려
빠짝 마른 대지를 더욱 메마르게 하는 듯 했습니다.

물 흔적이 전혀 없는 논 밭...허물어진 듯한 논밭 두렁...
서너 개의 굴뚝을 갖고 있는 깜깜한 잿빛 주택들과 긴 회색 담장...
인적이 드문 동네들...관광용 도로 가에 드문드문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북 경비병들...
이들은 관광객 경비 목적이라기 보다는 주민 차단용 아닌가 싶었는데
무표정하기도 하면서도 호기심 같은 살피는 표정이 엿보이기도 하더군요.
나무로 만든 전보대가 달고 있는 세 줄 전깃줄....
한 줄은 전기, 한 줄은 전화, 한 줄은 라디오 안테나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네 60년 대 처럼....

이것들만 보면 정말로 "오랜 간의 정지와 결핍이 낳는 체념" 만이 보이지만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 주민 통행 도로에 흔하게 눈에 띄는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들, 뒤에는 아이가 타고 있기도 합니다.

얼어 붙은 강에서 지팡이로 얼음판을 찍어 가며 썰매 타는 아이들...
둑방 길을 아버지 자전거에 매달려 가던 아이들...
논을 가로질러 달리던 빨간 바지와 두툼한 옷의 아이...
이 아이들이 희망을 보게 합니다.
뭔가 힘을 보게 합니다.
즐거워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면 오버일까요?

어느새 행복의 필수조건에 물질과 풍성한 자유가 들어 있는 내 가치관이
꼭 맞는 것 만은 아닐거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더군요.
행복은 자족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 왔지만...

내가 낫살 먹어 가면서 가장 경계하는 것..

흔한 생각과 취미 2005. 4. 13. 18:13

완고하게 되어선 안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젊어선 이거 저거 다 해 보고 싶은 것이 일반이라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면 안 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정형을 정해 놓고 그것에 맞춰 시비를 가리고
자기 인생의 잣대로 재게 됩니다.
유연한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너무 유연해지지 않을까 경계합니다.

그러나 나이 먹어 가면서 제법 깎이고 짤리고 하여 둥근 것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지요.
딱딱하고 굳은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너무 경직되지 않을까 경계하지요.
눈에 핏발 세우고 미간과 이마에 주름 깊게 하여 목청을 돋우는 것은
정말로 드뭅니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것이 더 편하고 보는 것이 편안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가르치고,
어떤 사물에 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피곤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일을 규정짓기 좋아 하거나 '나는 선하니까'
'나는 옳으니까' 하는 일도 가당치 않아 합니다.
한마디로, 고집불통성이 신념과 동일시 되지도 않으며

완고함이 정직이나 도덕성 수호의 다른 얼굴도 아닙니다.

정말 완고하지 않고 싶고 난폭하지 않고 싶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이야 물론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을 경계하려 합니다.

방금 보여진 어떤 모습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전부 이겠습니까?

신념 철학 근면 정직......
많은 미덕이 있지만, 중년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좋은 미덕으로 삼아야 할 것은 너그러움 같습니다.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완고함인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고집스러워 보이면, 완고해 보이면 나의 온전치 못 함을 일깨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