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 테마가 된 가거도 여행

흔한 생각과 취미 2005. 4. 15. 18:16

프롤로그


여행엔 즐기기 위한 여행이 있고, 사람이 주제가 되는 여행이 있지요.

이 여행은 당연히 후자 입니다.

도사님과 원주 창, 그리고 리니야드 님이 조촐하게 가기로 했다는
소식과 하늘전사의 강한 권고를 접하고는 가거도행을 결정하게 되었지요.

지금 와서 가거도 행을 떠 올리면 무슨 시나리오나 희곡과 같이 몇 개의
장면으로 뚜렷이 분획이 됩니다.

즉, 진천에서의 집결과 삼겹살 파티, 목포행 노정과 새벽 유달산 등산,
가거도행 여객선, 가거도 1구에서의 비행시도, 수호 고향 도착과 섬 풍경,
대풍분교 풍경, 수호 친척들과의 저녁 모임, 부둣가의 밤 풍경, 창과의 조각배 잠,
갯바위의 그믐달과 해맞이, 수영, 목포행 여객선에서의 의논, 익산 여명권 교관
과의 뜨거운 토론, 군산 오성산 활공장, 서천 춘장대 해수욕장에서의 해수욕,
부여행 길가의 부용화, 부여에서의 마지막 삼겹살 파티와 헤어짐..............

1. 출발

항동 주파수 144.26을 맞추고 드디어 천리길 목포를 향해 출발!

2. 길과 유달산 새벽 등산
목포까지 다섯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고, 내일 가거도 가는 배는
아침 8시에 출발하므로, 항구에 7시30분 까지만 도착하면 된다는
하늘전사 수호의 말에 따라 쉬엄쉬엄 주행하기로 함.

도착하니 28일 오전 3시 경......

유달산에 오르다.

유달산주차장에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노적봉입니다.
우리 지형에 대해 잘 모르는 왜군에게 노적봉을 낟가리로 보이게 만들었다더니
정말 짚만 덮어 씌우면 곡식 낟가리로 분명히 보이겠더군요.
거기에다가 강에다가 뜨물까지 흘려보내면 속지 않을 외국인이 있겠습니까?

조금 오르니 그 유명한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나타났습니다.
다 아는 노래지만, 목포의 새벽에 이 시를 만나니 정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여기서 3 절을 불러 봅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다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임이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언제 들어도 정감이 가는 우리 노래입니다.

조금 더 가면 선비가 신선이 되었는지, 선비와 신선이 같이 바둑둔 건지
모를 "유선각" 에 이릅니다.
여기서 목포를 내려다 보아도 웬만큼은 다 내려다 보입니다.
삼학도, 해협사, 앞바다의 배들......참 정겨운 동네로 다가오더군요.
다들 힘이 빠졌는지 그냥 여기서 있다가 내려가자는 것을
유달산 정상까지 가자고 하여 해서 몇 사람은 가기로 했습니다.
이정표 상에 "일등바위" 라고 제시되어 있었는데, 아마 거기가 정상인
모양입니다.

좀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얼굴과 가슴으로
쏟아져 안깁니다.
정상이 가까워 진 것이지요.
유달산 꼭대기에선 그야말로 전후좌우 사방이 훤히 눈에 들어 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람이란 것도 전 방위에서 불어 오는 느낌입니다.
목포 사람들이 어찌나 부지런한지 이 때가 새벽 네시 정도 되었는데
삼삼오오 아침운동을 나와 정상까지 올라 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호가 말매미를 잡아 가지고 오길래 그 놈이 아마 이제 종족번식을
다 마치고 이제 힘이 빠져 흙으로 돌아갈 놈일거다 라고 했지요.
그래도 아직 살 힘은 남았던지 공중으로 날려주니 푸드득하며 날아갑니다.
편편한 곳을 골라 누우니 얼마나 시원한지 모든 것을 다 잊게 되고
못 잔 잠이 저절로 찾아 오는 듯 합니다.

3. 가거도행 여객선 안에서...
갖고 간 자동차는 하루 5000원씩의 주차장에 맡기게 됩니다.
가거도행 여객선은 12시 정각에 출항하였는데 정원이 약 360여 명 되는
아주 큰 배입니다.
자리는 좌석제로 되어 있으나 자리가 남으면 아무 자리에든지 앉아도
됩니다.

배는 냉방이 너무 잘 되어 추울 정도 입니다.
고급 여객선이므로 바깥엔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자리를 잡자 마자 어느 새 잠이 들었다가 중간에 도초비금도, 흑산도 등에
잠깐 잠깐 기항할 때마다 살풋이 잠이 깨다가 어느샌가 기분좋게 잠이
깨게 되었습니다.
도사님 댁과 창은 그림같이 조용하고, 팬님은 좀 왔다갔다 하시는 것 같고
수호는 자고 있는 것 같더군요.
리니야드 님이 뱃머리 쪽에서 바다 구경을 하고 있다가 자리로 돌아 오길래
맥주를 마시기로 하였습니다.
팬님과도 두어 캔을 나누어 마시니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여객선에서의
맥주 마시기라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여기저기서 구토하는 소리에
잠이 깼지요.
창과 형수님 까지 배멀미를 했다 합니다.
우리 맥주 팀은 모두가 말짱했는데, 나는 맥주를 마셔서 속에 면역력을
심은 때문이라고 하고, 리니야드 님은 뱃머리에서 배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 적응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는 둥 논란이 많았습니다.

4. 가거도 도착
오후 12시 반쯤에 가거도 1구에 도착.
여러 종류의 선박, 자동차, 방파제 공사 장비, 대형 크레인 등으로
제법 북적거리고 사람들도 많이 왕래합니다.
다방, 노래방, 술집, 식당, 민박집도 제법 많아 섬동네치곤 활발합니다.
그러나 수호가 이곳 정통 토박이임을 증명이나 하듯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수호와 인사를 하며 지나갑니다.
가거도는 1, 2, 3구로 나뉘어져 있는데, 1구와 2구는 고개 하나 차이이고
3구는 대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바로 하늘전사의 고향입니다.

3박 4일의 짐과 패러장비까지 합치면 아마 20키로는 될 것 같은 짐들을
끌고 다니기엔 날씨가 너무 더웠습니다.
저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무더운 날씨라니.......
무슨 태풍인가가 오키나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길가에서 동네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태풍이 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수호의 친척이 하는 아는 이름도 예쁜 "미로식당" 에서 점심을 대충 먹고,
수호의 후배가 운전하는 1톤 화물차를 얻어 타고 이륙할 만한 곳으로
올라가니 좌우의 능선이 만나는 안부입니다.
착륙장은 크레인과 바다 사이의 모래 사장이면 되겠다고들 합니다.

도사님과 팬님이 바람에 관해 의논하는 사이에 하늘전사가 기체를 펴고
비행복을 입고 이륙을 시도하였습니다.
바람이 너무 거칠고, 불규칙하여 이륙이 제대로 되질 않습니다.
낚시 포인트 찾듯이 밑으로 내려가면서 이곳 저곳에서 이륙을 시도하다가
어디선가에서 10 여번 만에 이륙을 하였지요.
이륙하자마자 바로 상승하더니 오른쪽 사면으로 날아가길래 저러다가
앞으로 못 빠져 나오거나 뒤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였으나
베테랑답게 바로 빠져 나와 하늘에서 좀 놀다가 방파제 앞에 잘 내려
앉는 게 보였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다가 누구라 말할 것도 없이 기체를 지고 내려왔습니다.
이래서 일차 비행포기가 이루어진 것이죠.

비행을 못한 채 무거운 기체를 지고 헐떡이며 내려오는 맛이라니......
부둣가에서 조금 기다리니 수호네 동네인 대풍으로 가는 연락선이
왔습니다.

1구에서 대풍까지는 약 15 분여 정도 걸리는데, 섬 일주 경치가
아주 그만입니다.
노란 나리와 원추리 꽃이 띠를 두르고 있는데다가, 사철나무 종류인
후박나무가 여기저기 자생하고 있었고, 아주 적은 수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절벽과 동굴이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어, 촛대바위, 망향바위, 돛단바위 등의
이름 붙은 바위들이 감탄을 자아냈지요.
수호는 어릴 적에 저 절벽을 타잔처럼 오르내리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그 사정은 기밀사항이므로 생략 하겠음.

5. 대풍 마을

대풍이란 곳은지금 12 호가 살고 있으며, 많을 때엔 45 집까지 살았다 함.
선착장에 도착하니 바로 앞에 아주 멋진 갯바위가 하나 솟아 있습니다.
아마 대풍 마을의 상징이나 되지 않을까 싶게 잘 생긴 바위이지요.
연락선 겸, 낚싯배 말고도 나룻배가 몇 척 매어 있어 작은 섬임을 실감함.
짐을 들고 숙소인 수호네 사촌 댁에 낑낑거리며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는데, 이 마을은 옛날에 새마을 운동을 잘해서 그런지 계단과
땅이 이미 흙이 없습니다.
아마 길과 마당들이 비바람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모든 바닥 공간은 이미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왼쪽 혹은 오른쪽엔 파이프로 난간이 만들어져 있고......
첨에 이 난간은 아마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갈 때 힘든 것을 덜기 위해서만
짚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별도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그것을 잡고 오르고 내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저녁 먹기 전에 수호는 저녁꺼리를 장만하러 바다에 나가고,
잠깐의 시간이 나길래 마을 뒷 길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이 마을은 논이나 밭은 별로 없고 산에 후박나무가 많아 후박나무 껍질을
벗겨 약재로 파는 것과 고기잡이, 낚시하는 사람 돕기 등으로
살아나간다고 합니다.
후박은 한약재로서는 아주 쓰임새가 많은 것인데, 건위소화, 정장제로 많이 쓰지요.

집집마다 대문은 거의 없고, 바람을 막기 위한 돌담과 블록 담만이
간단히 쳐져 있었지요.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꽤 되었으며 쓸어져 가는 집도 눈에 띕니다.

6. 폐 분교

흑염소가 있는 뒷동산에 올라 오른쪽을 쳐다보니 작은 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리니야드 님과 같이 가 보니 이미 폐교가 된 대풍분교입니다.
하얀 망초로 가득찬 손바닥 만한 운동장, 교실 두어개.......
어떤 아저씨가 신문을 보고 있어 리니야드님이 붙임성있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니 아저씨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합니다.

망초꽃 운동장을 가로 질러 왼쪽으로 가니 담이 안쪽으로 쓸어져 있어
거기로 가니 바로 가거도 앞 바다가 훤히 들어옵니다.
이 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공차고 뛰어 놀던 아이들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지금은 이 동네에 아이들은 거의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거기서 사진 몇 장 찍고 둘러보니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보입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동판도......
리니야드 님이 우스개 소리를 해서 한참 웃었는데,
이승복이가 실제로는 그런 소리는 안 했다는 거지요.
나도 조선일보에서 직접 취재도 않고 승복이 형 얘기만 듣고
작문을 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얘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닙니다.
즉, 당시에 공비가 "우리 공 놀이 하자"고 했을 때
승복이가 "싫어요, 난 공 상당히 싫어요" 라고 했다는 거지요.

교실에 들어가니 마룻바닥은 중간중간이 주저앉아 있었고,
틈이 별로 없어, 이 밑바닥을 기던 놈들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 서운했지요.
칠판엔 이 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그려놓은 그림과 글들이
어지럽게 있었는데, 뭐 "누구 누구 여기 다녀가다"........등등
한국사람들의 글 남기기 전통은 참 대단합니다.
뭐 좀 추억의 끄트머리를 매달게 있나 찾아 보아도 별로 없어서
싱거워져 가고 있는데, 애들의 셈을 가르치던 괘도가 눈에 띄어
뒤적여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 학년의 시간표가 칠판 귀퉁이에 붙어 있음을 찾았습니다.
2,4,6학년의 여섯시간 시간표.......
특이하게도 6학년 시간은 빠져 있었습니다.

약간은 썰렁한 느낌에 잠겨 학교를 빠져 나오니 바로 작은 계곡이
흘러 내립니다.
물이 맑고 차서 세수를 하고 손으로 떠 마시니 물맛도 달더군요.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이 물이 히한하게도 많았다는 것이 상기됩니다.
섬 치고는 물이 정말로 흔해요.
집집마다 수도가 다 있고, 동네 꼭대기엔 커다란 물 탱크가 있었습니다.
물이 흔하면 인심도 후하다고 하지요.
기분좋게 내려오니 맛진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7. 수호 사촌 손님들과의 질탕한 술 자리
우리의 잠자리는 하늘전사의 사촌형님댁이고, 먹는 자리는 골목길 건너집으로
거기도 사촌형님 댁 입니다.
이 집엔 인천의 해운항만청에서 근무한다는 수호 사촌형님-김 주안 씨-이
학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며칠 째 묵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최미미 팀, 푸른이상과 하늘미소가 나에게 사귀길
극구 권고한 모란각 체인점 사장님인 유 사장님도 여기에 묵고 있었지요.

저녁 식사 자리에 앉자 마자 우리 쪽 통성명은 묻지도 않고 김주안씨가
좌중을 휘어잡아서 술도 권하고, 자기 쪽의 친구들 자랑과 자라 나던 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조선대학교 마취과장이라는 유 과장 님, 외과과장 누구누구, 둥글고 큰 얼굴에
깍두기 머리를 씩씩한 인상의 의료기상사 조 사장 님......
우리는 술이나 음료수, 과일 같은 것을 하나도 준비해 가지 않았는데
이 분들은 엄청 준비를 많이 해 왔더군요.

에이~~ 주량이 도량이다! 라는 생각에서 소주를 주는대로 받고,
계속 잔을 돌려가며 기분좋게 어울렸습니다.
이런 배짱을 알아나 준 듯이 리니야드 님까지 다북다북 술잔을 사양치
않는 것입니다.
나중엔 저 쪽 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켜가고, 사촌까지 슬슬 피하고
말더군요.

8.따개비와 거북이 발톱 먹기

수호가 채취한 조개 종류엔 따개비와 거북이 발톱이란 것이 있었는데,
삶은 것들을 파고 빼 먹는 재미가 또한 일품이었지요.
수호가 잡아 온 칠돔- 일곱가지 색깔이 나는 돔으로서 정말 희귀한 고기임-과
우럭, 그 매운탕과 맛있는 고추장에다가 두 그릇으 밥을 뚝딱 해치우고는
저녁자리를 끝냈습니다.
후우 후우~~~
투닥! 투닥!
숨 가쁜 소리, 그리고 배 두드리는 소리........

9.선착장의 노래와 별헤는 밤
밤에 되어 선착장에 나가니 리니야드 님과 창이 바위에 앉아 노래로써

분위기를 한껏 잡고 있습니다.
주로 동요, 80년대 포크 송으로......
술도 적당히 취하겠다, 바람은 시원하겠다, 이만한 환경이 어디에 있겠어요?
적당한 나룻배에 올라가서 누워 팔베개를 하니 족하고 족한 대장부 살림살이를
떠 올릴 수 있을만큼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가 어느 새에 별이 총총 얼굴을 내밉니다.
그 유명한 가거도 모기마저 쫓을만큼 시원한 바람과 태풍을 며칠 앞 둔
파도가 선착장 바위를 철썩철썩, 화르르......때렸다가 바다로 돌아가고.....
또 창과 리니야드 님의 합창 소리.......
나는 노래를 따라 하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후우후우 거리기도 하고......

오랜만에 뚜렷이 보이는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 많은 별자리들을 알았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이름이 그렇게 생각이 안 나더군요.
대신에 우유빛의 은하수를 목이 싸아해지도록 마셔댔지요.
섬의 은하수는 그야말로 깨끗하고 맑고 더 푸근해 보입니다.

10. 창과 나룻배에서의 잠과 그믐달
창 들이 노래하는 동안에는 깜박 졸다가, "주능님! 노래~~" 하면
노래를 부르기를 여러 차례.......
그 사이에도 하늘엔 별이 총총 하다가도 구름이 쫘악 깔립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정지 되어 버렸습니다.

눈을 떠 보니 창이 졸려서 금방 들어갔다는 겁니다.
리니야드 님도 들어가겠다는 말에 숙소로 돌아가니 창이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있었습니다.
창이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서 자자는 멋진 제안을 하여
둘이 조각배로 내려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때가 아마 새벽 한 시쯤 되었나요?
나는 뱃머리에서 세로로, 창은 뒷전에서 가로로 자리를 잡고
모기향을 피우고, 바르는 모기향을 몸에 뿌리고선 얇은 이불을
덮었습니다.

창은 금새 잠이 들었는 듯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난 나이 먹었다고 잠이 바로 들지는 않더군요.
대신에 시원한 바람은 원도 한도 없이 온몸으로 맘껏 받았지요.
바람이 단순히 얼굴로만 오는 게 아니라 목덜미, 배, 가슴, 옆구리,
심지어는 바지가랭이와 바지 틈으로까지 들어 옵니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꽉 끼었다가 별이 반짝반짝하고.....
가끔 모기가 왱왱거려서 쉽게 잠이 안 들어 애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로로 누웠지만, 배가 약 15도 정도 비스듬히 기울은 탓에
자꾸 몸이 밀려 내려가게 되어 신경도 쓰이고.......

11. 새벽 녘의 고기잡이 배의 귀항- 새벽 풍경

어영부영 비몽사몽, 엎치락뒤치락 하는 시간이 짧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가끔 동네에서 랜턴을 켜 갖고는 선착장으로 내려 옵니다.
그러면 한 2-30분 정도 있으면 어느 쪽 바다에선가 배의 엔진음이 들리며
배가 들어 옵니다.
아마 고기잡이나 낚시 나갔던 배를 마중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밤에 왕래할 때 안전하게 오르고 내리게 하기 위해
철제 파이프 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정도로 수호 네 동네가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거든요.

배를 몇 척인가를 맞이하고, 잠을 억지로라도 청하다가
어느 순간 눈을 뜨니 앞의 갯바위 위에서 뭣인가가 하얗게 빛났다가
없어 집니다.
자세히 보니 구름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조금 있으려니 다시 하얀 빛이 납니다.
잽싸게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하니 구름 속에서 하얀 달이 빼꼼이 얼굴을
내밉니다.
바로 음력 27일 달, 그믐달입니다.
약간 볼록하게 휜 가운데 부분이 나타나더니 상하의 날카롭게 휜 부분이
완연히 자태를 드러냅니다.
그믐달과 초승달의 다른 점은 그믐달은 왼쪽이 볼록하고 초승달은 오른쪽이
볼록하지요.
그믐과 초승의 차이는 불과 너댓새 밖에 안 되는데.....
그믐달은 동쪽에서 볼 수 있고, 초승달은 서쪽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창을 깨워 그믐달을 보여 주니 역시 대단히 감탄을 합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그믐달이기 때문에 내 앞은 분명히 동쪽임에 분명하고
잘 하면 가거도의 일출까지 맞을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그믐달의 숨바꼭질을 한동안 즐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합니다.
선착장으로 내려 오는 사람도 빈번해지고.....
잠을 포기하고 조각배에서 일어났습니다.
어제 술을 같이 마시던 몇 사람도 바닷가로 나와 인사를 나누고는
갯바위를 보니 로프가 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2. 가거도 일출
해가 떠 오를 시간이 된 것 같아 여기저기를 가늠해 보고는 앞에 갯바위로

로프를 잡고 올라갔습니다.
갯바위에 가려서 안 보이던 바다가 이 바위에 올라서 바다를 보니
그야말로 또 다른 바다가 펼쳐집니다.
얇게 깔린 구름은 떠오르려는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하늘은 밝은 거울쪽 처럼 환해 있습니다.
해는 수평선에서 조금 떨어진 위에서 빛나고 있어, 수평선 일출은
놓친 것이지요.

가슴이 툭 터지는 통쾌함, 그리고 행복감이 온 몸을 휘감습니다.
어떤 노래의 가사말, "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와져~~~"이 저절로
떠 오릅니다.
그리고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묘비명도 떠 올랐습니다.
"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므로....... "
자유, 긴 자유만 자유인가, 순간 순간에 느끼는 짧은 자유느낌도
자유 아닌가?
자유가 꼭 어떤 상태만을 가르키겠는가, 느낌만으로도 족할 때가 있지
않겠는가?

혼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다가 큰 흥에 겨워 창을 깨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을 깨워 카메라를 가져 오게 하여 "쇼생크" 사진을 찍고, 창도 올려 보내
사진을 찍어 줬습니다.

아, 정말 좋은 아침입니다.
글자 그대로, "좋은 아침"입니다.

13. 가거도 출발, 섬 일주, 목포행 여객선에서...
태풍이 상륙하든, 비켜가든 우리가 출발하기로 예정한 날짜인
31일엔 나가기가 힘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아쉽지만 오늘 떠난다고 하여 잠시 고민을 좀 하다가
서둘러서 짐을 꾸려서 가거도 항구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약 3-40분 가까이 섬을 돌았는데, 정말로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딱 배 한척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 돛단바위, 망향바위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구경을 하였지요.
태풍의 영향으로 물결이 제법 드세어 출렁출렁하여 어떤 파도는 배의
높이보다 두 배는 더 높아 스릴과 위험감을 갖게 합니다.
난 배의 앞전에서 수호와 같이 가다가 덮치는 파도에 홈빡 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타이타닉의 여주인공 폼을 잡아 보기도 하고,
구경도 구경이지만, 요동치는 연락선 위에서 파도와 바람을 즐기는
것은 더 일미가 되었습니다.

14. 귀경 길...익산...순두부 백반을 맛있게 먹는 법.
익산에서 자고, 아침에 근처 식당에서 순두부 백반을 맛있게 먹음.
순두부는 70년대 중반의 나의 대학 생활에서 고급 외식문화를 장식하던
추억의 음식이지요.
쌍화차에 달걀 노른자가 꼭 띄워 있듯이 순두부백반엔 반드시 달걀이
있어야 했지요.
라면이나 짜장면 같이 돈이 들어가는 것이면 제대로 못 사먹었는데
순두부는 말할 것도 없지요.
내 기억으론 700원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순두부 백반의 값이.....
그래서 순두부를 주문하고 나서는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계란의 유무인데, 내 순두부엔 계란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불안에 차서 다른 사람의 것을 보니 다 있어요.
자신있게, 분노를 억누르고 주인을 불러 왜 내 꺼엔 달걀이 없느냐고
하니까 다 넣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숟갈을 휘휘 저어보니 순두부에 쌓인 계란을 간신히
찾아 냈지요.
의기양양하게 먼저 계란을 꺼내 맛있게 먹고 밥을 다 말아서
마침 맛있게 익은 배추김치의 퍼런 이파리를 밥숟갈에 올려 놓고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지요.

그런데 건너편을 보니 리니야드 님이 밥 한 숫갈 먹고 물 마시고,
다시 또 밥 한 숟갈 먹고 물 마시는 식으로 아주 맛없이 먹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니까 뜨거워서 그렇답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먹는 방법을 아르켜 주니 그제서야 잘 먹더군요.
난 이번 여행에서 한 사람의 아주 안 좋은 식습관을 하나 고쳐 줬지요.
나중에 식당에 도착한 팬님과 창에게도 순두부 백반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또 전수했지요.
수업료 한 푼 안 받고서.......

15. 서천 춘장대 해수욕장
익산 여명권 씨의 안내를 받고 춘장대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날씨가 엄청 뜨겁고
습도도 높아 해수욕장의 여름을 정말로 실감하겠더군요.
차 한 대 당 4000원이라는 주차요금이 아까워서 길가에 차를 세우자는
도사 님 말씀을 따라 해수욕장 까지 걸어가니 저절로 헉헉이 됩니다.
그늘 덮인 평상을 빌려 자리를 잡으니 그제서야 더위를 식혀 주는
서해 바람이 시원하게 들이칩니다.

노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갯바위 팀인 리니야드 님, 창과 같이 바다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애들 처럼 3.6.9 께임을 하면서 물총을 쏘기도 하고 튜브에 앉아 파도를
타기도 하고.......

16. 부용화
충남은 아마 기관에서 길 가에 꽃을 많이 심기로 권장한 모양입니다.
백일홍, 칸나, 깨꽃, 해바라기, 무궁화, 접시꽃 등등.....
어디를 가니까 굉장히 꽃잎이 큰 꽃이 심겨 있더군요.
이 꽃을 전엔 무궁화 종류, 접시꽃 종류로 알았는데, 이날 첨 알았지요.
도사님 왈......부용화라고 합니다.
무슨 사물이든지 각기의 이름들이 다 있어 어울리지만, 꽃들은 특히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함박꽃, 모란꽃, 목련꽃, 후박나무 꽃, 싸리나무 꽃.......
이 부용화 역시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꽃이라는 느낌입니다.
꽃잎이 얼마나 큰지 꽃잎 하나가 아마 손바닥 반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꽃잎이 부드러워 바람이 불면 다섯 개의 꽃잎이 펄럭펄럭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부용산이라는 노래를 불렀지요.
지리산 파르티쟌들과 그 식구들이 입으로 입으로 전해가며 불렀다는.....
느리고, 높낮이가 크고, 구슬픈 곡조의 노래입니다.

17.헤어짐과 마침

도사 님이 저에게 끝을 맺는 "위하여" 선창을 권하셨습니다.
"수 천리길에서 맺어진 좋은 인연들이 참 좋습니다.
모두 좋은 분들이고 짧은 시간이고 태풍 때문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지만
정말 뜻 깊은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2001년 가거도 여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