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 12 월, 서울의 명동 밤 유영기

기본카테고리 2007. 1. 31. 15:00

연말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대개 들뜬다.

그냥 그 들뜨고 노는 분위기에 실려 가고 싶어 한다.

일년 내내 분주하게 일을 하다가 에너지도 떨어지고 긴장도 좀 풀어지고, 뭔가 풀어 놓고 싶은 심리가 되는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나라 최근대사의 격동기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 온 사람들인 4-50 대의 국민들, 통금을 겪은 사람들이 아직 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어 이 시대의 지배향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6.25 전쟁이 가져 온 시대상을 반영하는정서와 문화가 7-80 년 대까지의 지배향수였던 것 처럼......

12.23 일 토요일, 기선이 화룡이 부부와 오랜만에 연말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 명동을 나가기로 하였다.

광화문 시청앞 청계천 일대에서 루미나리에 (빛의 축제)를 한다고 하고, 명동의 크리스마스 기분을 보고 싶었다.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싶어하는 기선네 계수씨를 위하여 세종문화회관 뒤의 베트남 쌀국수 식당을 찾아 갔으니 8 시가 넘어서 그런지 문을 닫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오랜만에 무교동 낙지를 먹자고 하여 원래부터 유명하다는 청진동의 한 낙지식당을 찾았다.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먹고 있는 집이 맛있을 것 같아서 무슨 할머니집엔가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아주 오래 전,대학 다닐 때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서 무교동의 어느 다방에서 커피 값 바가지를 씌우길래 싸움을 하고는 나오던 일이 생각나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들 웃었다.

오늘도 크리스마스를 앞둔 토요일이라서 사람들이 많아 식당이나 찻집에서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까 궁금하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참 오랜만에 접해보는 무교동 낙지다. 한 25 년도 넘은 시절에 백단 사람들과 막걸리와 매운 무교동 낙지를 먹고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가물가물하다. 오늘의 낙지 맛은 전 보다는 그렇게 맵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의 입 맛에 맞추기 위해서 달고 덜 맵게 하고 있지나 않나 모르겠다.

낙지볶음과 조개탕, 오십세 주를 시켜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에 얼굴이 금방 벌개진다.

조개탕은좀 우그리고, 한 쪽 손잡이를 일부러 떼어낸 납작한 냄비에 담아 왔는데 제법 운치가 있고 시원하다.

나 화룡이 부부가 특히 술빨이 당겨 많이 마셨다.

나는 항상 기분 좋아야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더 기분이 좋다.

오늘도 즐겁고 기꺼운 기분으로 술을 마시니 흥이 저절로 나고 기분이 날아갈 듯 가볍다.

얼굴로 달아 오르는 열기, 적당히 차 오르는 숨, 풀려가는 듯한 눈이 편안하다.

까짓 것, 얼굴 좀 빨개면 어떠랴......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적당히 배부르고 적당히 취한 상태에서 종로 거리로 나오니 사람들이 매우 북적거린다.

그래, 사람 구경하려고 나왔는데 잘 됐다. 연말엔 사람들이 좀 북적거려야 연말 맛이 나는 거야.

젊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내 또래의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일반적 정서라는 거, 지배적인 정서라는 게, 그 흐름이라는 것은 비슷한 모양이다.

저 아저씨 아줌마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나왔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는 확실히 보통사람 임에 틀림없다.

프레스센타에 원추형의 큰 빛의 나무를 세웠다. 노랗고 바알갛고 파아란 등들이 참 밝다.

사람들이 보고 경탄해 하며 사진 찍느라고 바쁘다.

이명박의 가장 큰 업적인 청계천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비젼을 갖고 제시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김민석과 경합을 벌였을 때 나는 이미, 이명박이가 당선될 것이라고 장담했었지만, 이것 하나만 갖고도 이 사람은 위인이다. 대통령으로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웬만하면 노무현 다음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꽉 막아 놓은 청계천 시멘 뚜껑 길을 확 걷어 내고 청계천 고가도로를 허물어 낸 그 안목은 확실히 남다르다. 개발 마인드가 지나치게 커서 환경을 오염시킨다거나 인간성을 잃어 버리게 한다든가 하는 우려는 내가 보기엔 개똥과 같다.

이렇게 무슨 일이 있어서 자발적으로 나와 청계, 비록 인공의 덩어리지만, 물을 보고 풀을 보고 걷는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공통의 감정과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다 즐거워 하고 행복해 한다. 이렇게 행복감을 같이 누리는 사람들이 한 데 모였단 사실도 신기하다.

2004 년 대통령 탄핵 규탄 촛불집회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건가?

세종로 로타리에서 남대문까지의 차선이 다 꽉 찼었으니.....

시청앞에는 둥그런 대문형의 루미나리에가 설치되어 있었다. 노랑 초록 빨강 주황 하양 색의 작은 전등들이 모인 덩어리......빛의 축제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에 몇 번 와서 전시를 하는 동안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우리 부부는 경석이가 해병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김포공항 공터에서 벌어진 빛의 축제를 구경한 바가 있었다.

빛의 축제도 이제는 하도 많다 보니 작은 규모는 좀 시부장찮다.

이제 서울은 편리를 최고로 추구하는 도시 수준은 지난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자동차가 지나가는 곳이 바로 시청앞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수대가 가운데 있었고 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로터리를 둥글게 형성하여 수많은 차량들이 교차하고 돌아가고 했다.

세종로 쪽에서(으로), 남대문 쪽에서(으로), 서소문 쪽에서(으로), 을지로 쪽에서(으로), 한국은행 쪽에서(으로) 광교 쪽에서(으로), 덕수궁 옆 골목길 쪽으로, 시청 정문 쪽으로......

무려 10 여 방향의 길이 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로터리를 없애고, 잔디 마당과 스케이트 장을 만들어 시민들이 구경하고 즐기게 하게 했으니 정말로 편익도시가 아니라 복지도시의 향기가 나기도 한다. 시청앞 광장으로 횡단보도가 나고, 숭례문 앞에도 횡단보도가 생겨서 남대문을 지척에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명박이가 대단하긴 대단하다.

먹고 사는 일에 지나치게 빠져서 많은 것을 희생하는 시대가 아니라, 적당히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전에는 좀 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하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동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7-80 년 대에꿈 꾸어 왔고 온몸으로 싸워 왔던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 이만들어 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경제개발 논리만 갖고도 안되며, 인권논리만 갖고도 안된다는 생각을 새삼 확인한다.

밝고 즐거운 이미지가 삶의 고통을 잊게 하는 마약 처럼 정신마저 갉아 먹기도 하지만, 고단한 삶을 한 순간이라도 잊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새로운 힘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에 밀려서 더 내려가고, 사진 찍고 설탕을 녹여서 부어 구은 "뽑기" 를 깨서 빨아 먹어가며 걷는다.

명동으로 가기로 하여 을지로 쪽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니 밤 10 시 밖에 안 되었는데 골목은 벌써 파장한 가게가 많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렇게 쓸쓸해졌다니......

가뜩이나 골목 바람이 휭 휭 많이 부는 곳인데 바람도 어김없고, 어두우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명동 큰 길로 나가니 불빛이환하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구세군의 자선남비는 시청앞에 이어 여기에도 어김없이 있다. 이웃돕기를 위한 길거리 콘서트 비슷한 게 있었는데 초딩 1,2 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율동을 한다. 구세군 남비에 이어 여기에도 돈 만원을 넣고, 아이 하나와 악수를 하였다. 아이의 재롱과 웃음이 아주 예뻤다.

오늘은 뭔가에도 다 기분이 좋고 기쁜 날인가 보다.

명동의 특수는 이제 완전히 한물 가고, 그냥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시청앞과 청계천에 자리를 내 준 것 같다.

20 대에 맛 보았던 해방감, 막연한 기대,퇴폐 분위기가 찐득거렸던 명동.

허전함만이 가로지른다.

그래도 추억의 찌끼는 남았고 나는 그것을 할짝할짝 핥았다.

더 걸으면서 수 십년 전의 정감을 찾아 보려 했으나 사람들이 춥다고 그만 가자고 한다.

그래서 롯데 앞, 을지로 입구 지하철역의 지하로 들어갔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늦어서 그런지, 그 많던 인파는 별로 없고 노숙자들이 빈 박스로 잠자리를 만들고 있다.

일부는 이미 한 사람 들어 갈 수 있는 곽집을 만들어 그 안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곽집을 사진 찍으려고 하니까 어떤 노숙인이 와서 찍지 말라고 하여 조금 다투다가 안 찍는 척하고는 몇 장 찍었다.

화려한 청계천, 번쩍거리는 휘황찬란한 루미나리에, 들뜨고 한 껏 웃는 사람들의 행복과 함께 지하철 로비의 노숙인들의 잠자리가 눈앞에 겹친다.

나는 휘적휘적,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2006 년 12 월의 서울 밤의 하루를 이렇게 겪은 것이다.

쉰 다섯 살의 겨울을 이렇게 보낸 것이다.

<2006.12.23>

<Janis Lan - In the wi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