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썪지 않은 장군 할아버지들과 사병에 대한 감상 [펌]

기본카테고리 2006. 12. 27. 11:56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평통 연설을 두고 말이 많다. 확실히 대통령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언어가 많다.
`군대에 썩으러 간다'는 발언 역시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말하기는 적절치 않은 표현이다. 대통령의 이른바 군대 발언을 두고장군 출신 할아버지들이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이 심하다.
대통령 표현이 거칠지만, 적어도 군대 관련 발언에선 크게 틀린 말은없다고 본다.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나같은 사람이 보기엔, 성우회나 재향군인회에 모인 장군 출신 할아버지들은 병사들의 현실과 속마음을너무 모른다.장군들은 병사들과 다른 밥을 먹고, 병사들과 다른 옷을 입고, 병사들과 다른 군화를 신고, 병사들과 다른 곳에서 잠을 잔다. 이런 장군들이 내무반에서 칼잠을 자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내내 한종류 전투복으로 생활하던 병사들의 고달픔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 경험에 비춰보면, 군대생활 가운데 훈련 시간보다 삽자루와 곡갱이 자루를 쥐고 노가다 작업으로 보낸 시간이 휠씬 더 많았다.
장군 출신 할아버지들은보람찬 군생활을 떠올리지 모르겠지만, 내가 병사로 겪은 당시 군대는 전혀 아니올시다. 나는 입대 뒤 훈련소를 거쳐 자대생활을 하면서 숱한졸병과 고참들을 만났지만, 국토방위의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을 본 기억이거의 없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군복무를 하던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군대에 썩으러 왔다"고 이야기했다.
연금 넉넉히 받아 노후 걱정없는 장군 출신 할아버지들이 믿고 싶은 사명감에 불타는 대한민국 군대와 그 시절 나같은 병사가 겪은 군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장군 출신 할아버지들이`썩는다'는 표현에 흥분하기 앞서 박노해 시인의 `썩으러 가는 길'을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논산훈련소나 후반기 교육받던 대전 육군통신학교에서 입대 동기들끼리 이 시를 돌려 읽으며공감했던기억이 난다.
썩으러 가는 길
-군대 가는 후배에게
열 여섯 애띤 얼굴로
공장문을 들어선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밥에 몸부림 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쓴 소주 이별잔 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지 말아라
똑같이 군복입고 똑같이 짬밥먹고
똑같이 땀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많이 배우고 가진 놈들의 치사한 처세 앞에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
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

빗지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며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따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로 고참이 되는 것
차라리 저임금에 노동을 팔며
갈수록 늘어나는 잔업에 바둥치는 이놈의 사회보단
평등하게 돌고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 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을 찾고 만들어라
돈과 학벌과 빽줄로 판가름나는 사회속에서
똑같이 쓰라린 상처 입은 벗들끼리
오직 성실과 부지런한 노동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 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속에 하나가 되는 또다른 그대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따까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의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따구를 감싸 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 깊이 새기거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노동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에 돌아오라

눈물을 닦아라
노동자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200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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