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는 왜 저러는 걸까?[정세현 전 장관 글, 펌]

기본카테고리 2010. 9. 9. 12:17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의 결과에 대한 해설을 하려고 정세토크를 며칠 늦췄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직 열리지 않고 있어서 다른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북한에 나포됐던 대승호가 7일 돌아왔습니다. 대승호 송환 문제 때문에 개성에서 사실상 당국간 물밑대화가 실질적으로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적십자사가 8월 26일 북한에 수해 복구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는데 북쪽에서 답이 없었어요. 30일에 다시 100억 원 상당의 지원을 할 수 있다고 액수까지 명시했더니 4일 답이 왔습니다. 기왕 줄 바에는 쌀과 굴삭기, 시멘트를 달라고 일종의 역제의를 했습니다.

정부는 북한의 역제의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고민하다가 북쪽이 6일 대승호를 보내주겠다고 발표하니까 바로 그 다음날 북한의 요구 사항을 공개했어요. 그런 정황으로 볼 때 개성에서 실질적인 접촉이 있지 않았겠나 하는 추정을 해봅니다. 대승호 선원 문제만 가지고 접촉하진 않았을 거예요.

앞으로 남북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풀려갈 조짐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예를 보면, 남북대화는 적십자 차원의 실무접촉으로 시작해서 점차 '레벨 업(level up)' 됩니다. 나중에는 적십자의 옷을 벗고 당국의 옷을 입고 만나는 식으로 대화가 발전했습니다.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처음 열릴 때 그랬고, 80년대에 랑군 사건이라는 불행한 일이 있고 난 후에 남북관계가 복원될 때도 수해물자 지원을 구실로 적십자회담부터 시작해서 당국간 경제회담, 국회회담까지 했어요.

정부 고위당국자가 5일 민간 차원의 쌀 지원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 복기해 보니까 아마도 개성에서의 접촉 과정을 감안해서 나온 발언 같습니다. 쌀을 받고 싶다는 북쪽의 요구가 간절했기 때문에 일단 민간 차원의 지원부터 풀어 주고, 적십자 차원에서도 줄 수 있다는 쪽으로 갔을 겁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8일 국회에서 대규모 식량 지원은 어렵지만 적십자를 통한 긴급구호 성격의 쌀 지원은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어요. '적십자를 통한 긴급구호'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당국 차원의 지원입니다. 적십자는 어차피 전달 통로예요. 과거에도 차관 제공 형식으로 쌀을 줄 때는 정부가 직접 했지만, 무상으로 줄 때는 적십자 통로를 이용했어요. 적십자가 돈을 모아서 주는 게 아니라 통일부가 운용하는 남북협력기금으로 쌀이나 비료사서 보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얘깁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앞으로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월 하순 쯤 이산가족 상봉제안하면 북한이 호응해 올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산가족 상봉을 딱 한 번 했는데, 그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작년 8월 북쪽에 가서 합의해 온 5개항 중에서 정부가 마지막에 있던 이산가족 상봉만 달랑 빼먹고 만 거였어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을 작년까지 총 17회를 했는데, 분명히 얘기하지만 그건 쌀과 비료 지원에 대해서 북한 나름의 보답 형식으로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작년엔 공짜로 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북한 입장에서 볼 때는 남쪽이 자기들한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대승호까지 비교적 순순히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 쌀 지원이 이뤄진다면 그런 분위기를 타고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반도 정세가 그럭저럭 관리되고, 11월 G20 정상회의도 잘 치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레그 "미국이 동북아에서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 ⓒ연합뉴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 최근에 들은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가 1일 <뉴욕타임스>에 기고를 했습니다. 러시아전문가들을 한국에 보내서 천안함을 조사했지만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것은, 그걸 공개하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타격이 되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러시아 소식통의 말을 전했습니다. 며칠 후에 한국 언론하고 인터뷰를 하면서는 천안함이 사고(accident)로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보다 더 상세한 얘기가 오는 23일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나올 것 같습니다. 미국 외교협회(ACFR)란 단체의 앨라배마 지부가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그레그 전 대사한테 30분을 줬어요. ACFR은 상당히 보수적인 외교 전문가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참석해서 발표를 하라고 하니까 그레그가 이런 질문을 했대요. '당신들 같이 보수적인 사람들의 모임에서 내가 천안함 얘기를 해도 되겠냐? 그래도 괜찮겠냐?' 그랬더니 CRF 쪽에서 '괜찮다. 그래도 들어야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레그 전 대사의 세미나 발표는 비보도를 전제로 한 건데요, 비보도라는 건 발표 순간에만 지켜지는거지 그걸 듣고 나온 사람들을 통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흘러나오고 기사화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레그가 천안함에 대해 발언을 하는 목적은 한국 정부를 어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이 또 다시 수렁에 빠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진실을 얘기하겠다는 거예요. 그레그가 자기와 가까운 한반도 문제 연구그룹 친구들과 주고받은 얘기를 들었는데, 그 사람들의 생각은 대충 이런 거랍니다.

'미국이 60년대 중반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 전쟁을 확대했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이라크 전쟁도 벌였지만, 그건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하고 짜 맞춘 정보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결국 미국에 재앙을 가져왔을 뿐이다. 지금 미국이 천안함 사건 이후 이명박 정부의 북한 때리기에 협조하고 있는데, 앞으로 미국에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정부가 잘 못되는 쪽으로 가고 있을 때 그걸 바로 잡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동북아정책 현장에 있던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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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