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년 여 만의 공룡능선과 반 토막 서북주능-"고통 즐기기 등산기-2"

기본카테고리 2008. 8. 15. 18:24
[중청에서]

대피소 매장에서 라면을 다섯개 샀다. 한 개에 1500 원. 생수는 2리터에 3000 원...

취사장은 지하에 있는데 탱크에 물을 안 채워 넣었는지 꼭 귀한 약수처럼 한 방울씩 나온다.

서북주능 도상에는 물 뜰 데가 없기 때문에 12 탕 까지 가기 위해 물을 충분히 가져가기로 하여,

내가 마실 물 1.8 리터, 지고 갈 물 1 리터를 챙겨 준다.

다풍님은 6 리터, 향기는 4 리터.....

여기서 한계령 쪽과 귀떼기청봉 쪽 갈라지는 삼거리까지는 5.1 키로미터인데 오후 2시가 다 되어 출발하였으니 좀 늦은 감이 든다.

오늘 귀떼기 넘어서 잘 수 있을까? 내리막 길이 태반이니 세 시간 남짓 걸린다면 가능도 하겠지만 지금 컨디션으로는 약 다섯시간 이상 걸려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삼거리까지 부지런히 가보기나 하자라는 생각으로 또 먼저 출발하였다.

[서북주능 내려 가는 길]

나의 산행 습관은 내리막을 좀 빠르게 내려가는스타일이지만, 오늘은 사정이 완전히 다름을 실감하였다.

내리막이나 오르막이 거의 같은 시간을 잡아 먹는다.

오르막에서도 아프고 내리막에서도 아프기 때문이다.

평시 같으면 정말 날아가지는 못해도 아주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 지형이었는데, 평지 외에는 다 아프니 고역도 이런 고역도 없다.

끝청을 오르는 산로도 참 가파르고 많은 땀을 요구하였다.

나름의 조망은 참 좋았으나 몸이 션찮으니 조망 즐기기도 사치에 불과하다.

그저 다리를 쉬게 하기 위해 '좋구나' 하는 마음으로 물끄럼이 쳐다 볼 뿐이다.

올라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대청 일출을 보러 올라가는 사람들이며 오늘 중청에서 잘 사람들 같다.

아주머니 수 십명이 올라가는데 나중에 보니 "성남여성산악회"라는 안내지가 바닥에 깔린 것을 보았다.

그리고 등산로 주변 일부에는 땅을 엄청 넓게 파서 무엇인가를 캔 흔적이 있음을 자주 보았다.

무엇을 캤을까? 천남성인지, 현호색인지?

무언가 군락을 이루었던 모양이다.

물을 좀 많이 마셔서 어깨를 파고드는 무게를 줄이기로 맘 먹어서 로니세롤 탄 물을 아주 자주 마셨다.

몇 년 전에 설악비행을 지켜보기 위해 왔을 때는 그렇게 몸이 지쳐서 다른 음식은 아예 손도 못 대고는 물만 마시고 내려 왔다가 구역질이 심하여 저녁밥도 못 먹었는데 이번 등산에서는 다리는 아플 망정 먹고 마시는 것은 전혀 지장이 없어서 체력을 소진시키지 않고 잘 유지되어 천만다행이다.

이것마저도 힘들었다면 정말로 헬기 신세를 졌을지 모른다.

역시 계속 아프다.

무슨 봉우리가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래도 모란동백과 사랑의 테마와 서른즈음에 등을 흥얼거리며 잠시 잠시 순간 순간 아픈 것을 잊으려 노력해 본다.

어드메쯤 와선가 지팡이가 고장이 났다

내리막에선 늘이고, 오르막에서 줄여서 사용하는 것이 편하여 그렇게 하다가 나사가 고장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헛디뎌 바위에 오른쪽 정강이 아랫 부분을 찢겨서 피가 나도록 긁히고 말았다.

허술한이음새 부분을압박붕대로 임시로 고정하고 더욱 조심조심 한참을 내려가다가 쉬니 일행 두 사람이 느긋하게 온다.

지팡이의 고장을 이야기 하니, 향기가 양쪽 지팡이를 짚고 내려가시라고 자기 것을 건넨다.

산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당찬 아가씨다.

나중에 보니 내 지팡이는 완전히 고장나서 뒤에서 버리고 주우다풍님과 하나씩 나눠서 지팡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술 비 차 바람을 합쳐서 닉네임을 만들었다고 해서 주우다풍이라는데 썩 괜찮다.

주우다풍은 큰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꽤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아마 좋은 사진이 꽤 될 것이지만 그 무게가 또한 우습지가 않다.

[달과 번개 치는 뭉게구름]

혼자서 다리를 끌면서 내려 오다가 보니 해는 뉘엿뉘엿한데 반달이 떠서 참으로 자태가 곱고, 그 밑에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것도 신비해 보인다.

또한 구름 윗 부분은 석양빛을 담아 바알간 것이 참 멋지다.

그래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으라고강력하게 권했다.

아마 2008.8 월 설악 등산의 백미 사진이 될거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 구름에서 번쩍번쩍 번개가 이따금 친다.

꼭 조영남의 노래 "제비"의 노랫말, "먹구름 울고 찬서리 친다해도...." 에서처럼...

그래서 제비를 좀 불러 보기도 한다.

이러는 동안엔 아픔을 잠깐이라도 잊는다.

"산을 왜 가나?"

"쉬기 위해서 오른다"

나의 이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처럼 내몰리는 등산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등산 계획 수정 결정]

사람들에게 귀떼기와 12탕은 포기하자고 하였다.

언제 내가 몸 컨디션이 좋을 때에 한계령으로 해서 귀떼기를 거쳐 서북주능과 12 탕을 다시 가자고 했더니 바로 향기가 제일 반색을 한다.

오늘은 삼거리에서 비박하고 한계령으로 내려가자고 하였다.

"네에! 감사합니다!"

"주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능님!"

등산을 일정대로 못한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하고 원망할 줄 알았는데, 선뜻 그렇게 하자고 한다.

다풍님은 이러구저러구 별 말은 없으나 그렇게 크게 불만스러워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고 참 고마웠다.

미안하기 그지 없다.

아아....그래도,

아니 그러고 나니 더욱 더인가?

참 길고

또멀다.

분명히 거리는 줄고 있을 텐데도 도대체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계령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드문드문 그치질 않는다.

그 때 마다 "안녕하세요" "좋은 산행 되십시오" "반갑습니다" "수고 하십니다" 등의 인사를 연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이런 다리로 설악을 걷고 있는 것을 모르리라.

군대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이 있는 것 처럼 내가 다리를 푹 쉴 수 있는 삼거리는 왜 이렇게 멀단 말인가?

날은 이미 어둡기 시작하여 헤드랜턴을 켰더니 또 접촉불량이다.

그래서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맨 눈으로 내려 오다가 향기가 건네는 랜턴을 머리에 두루고 길을 재촉한다.

산에선 안전사고를 내지를 말아야 한다는 것이 산을 못 타는 사람들의 금과옥조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천천히 안전하게 걸음을 재촉하였다.

날이 완전히 까매져서 랜턴을 안 비추고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서 8시는 훨씬 더 넘은 모양이다.

이쪽 사면이 서북쪽이기 때문에 노을의 잔명도 들지 않으니 일찍 어두워질 것이다.

[삼거리]

그러다가!

시간의 흐름에 내가실려 삼거리까지 저절로도달한 것 같이 어느 굽이를 돌아가니 딱 삼거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수 많은 봉우리 중에서 어느 한 봉우리를 딱 오르자마자 삼거리 공터가 있었으면 얼마나 실감났을까?

한 굽이의 평탄한 길을 돌자 마자 삼거리를 만나서 허전하기까지 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25 년 여전에 서북주능을 돌면서 죽을뚱 살뚱했고, 몇 년 전 설악비행 때에도 죽을뚱 살뚱했는데, 어떻게 서북주능만 오면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닉도 서북주능으로 지은 것이지만 설악의 서북주능이 내게 텃세를 받고 있는 것인가 해서 실없이 웃음도 난다.

이 때 시간이 8시가 넘지 않았나 한다.

그렇다면 중청에서 6 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니 기적같이 내려 온 것이다.

어제 오늘 뻗쩡다리로 걸으면서 다리가 몹씨 아플 때마다 대학 1 학년 때 소아마비 다리로 백담사에서 설악동으로 넘어 간 친구 윤석용의 대단함을 생각했는데 그가 새삼 보고 싶어졌다.

서편에는 아까의 달이 바로 밑으로 번개를 번쩍거리는구름을 보고 있었다.

별도 저렇게 초롱초롱하니 비는 소나기도 안 오겠지 하면서 안심 반 걱정 반도 해 본다.

아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새삼 끔찍해지고 얼떨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이번 등산을 기적의 등산이라고 명명하였다.

[고행의 대가가 철철 넘치다- 설악의 밤]

저녁 밥을 먹고 자리에 누우니 까만 하늘에 맑은 달과 밝고 큰 별들 뿐만 아니라 작은 별들이 꽤나 총총히 박혀있다.

고사목은 보석을 달고 있는 것 같다.

그 고사목을 씻으며 내 귀로 들리는 바람소리는 불어 오는 바람 같지가 않다.

쏴아쏴아 거리는 것이,

투둑투둑 나뭇잎을 두르리는 것이 마치 비가 와서 부딪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세밀하게 귀기울이고 눈으로 찾아 보아도 빗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쏴아 거리고 투두둑 거린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 이 공간에 딱 어울리는합주를 위해 내 주위의 것들이 바람을 불러 오는 것 같다.

나뭇잎 사이로 별빛들이 영롱하다.

이쪽 저쪽에서 유성이 하늘을 긋고 떨어진다.

정말 오랜만의 별똥들이다.

여름 밤에 시골 마당의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며 동요를 부르던 때가 생각난다.

특히 별 삼형제라는 노래...

설악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틀 간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다.

비박 잠이란 것은 잠을 조금이라도 소유했으면 족하다.

나는 거의 못 잔 것 같아도 옆 사람이 내 코 고는 소리를 들었다 하니잠이 든 것이 분명하니 불면의 고통은 그 순간부터 없어진다.

까만 티셔츠를 꺼내어 얼굴에 덮고 침낭 안에 누워 있으니 얼굴이 따뜻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니 그 나름대로 편안하다.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대청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이 자꾸 올라 온다.

와서는 기웃거리고 한 마디씩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가 오른다.

한 부부가 올라오면서 부인이 대청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올라가는 중에 남편이 와서 마구 야단을 쳐 댄다.

"그 쪽이 아니야. 왼쪽으로 가야 해. 확 메다꼬나 버릴라...."

그러나 내 생각에는 대청으로 갈 사람들인데 남편이 잘 못 알아 귀떼기청봉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 쪽은 귀떼기예요. 귀떼기 쪽으로 갈 건가요?" 라고 소리쳤는데 아무 대꾸가 없어,귀떼기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길 바랄 뿐이다.

[고행의 대가-설악 여명]

네 시가 다 되니 어느 팀이 와서 여명 경치는 이곳이 끝내준다면서 웅성거리고 소리치고 한다.

그래서 시끄러워 더 눈을 붙일 수도 없고 하여 일어나서 여명 구경에 한 몫 끼었다.

신비한 설악 여명이 펼쳐졌다.

능선의 선과 수평선 같은 직선의 안개 띠와 하늘 빛이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을 모르는 경지이다.

이것도 엄청난 고행의 대가로 뿌듯하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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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 한계령]

한계령으로 내려가는 거리는 이정표에 3.2 킬로 미터로 나와 있고, 한계령 휴게소에서 여기 삼거리까지는 보통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지만, 전에 내려갈 때 보니 오르막이 역시 가팔라 두 시간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전에 내가 내려갈 때에는 거의 내리막이 많아 한 시간 남짓 걸렸으나 오늘은 아예 시간 계산이 필요가 없다.

아예 네 시간 정도 잡고 내려갈 생각이다.

역시 마음과 예상대로 네 시간 정도 걸렸다.

중간의 고통과 이 악물기는 어제 보다 훨씬 더 했다.

그나마 내리막 계단이 더 많아 거꾸로 뻗정다리로 내려갈 수가 있어서 빠를 수가 있었다.

보폭 30여 센티로 3 키로를 걷는다면 사실 천 걸음 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등산이다.

서울 가서도 이 다리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은데 걱정이다.

평지에선 그런대로 참을만한 통증이지만 조금이라도기울어진 데에선 찌르는 통증이 엄습한다.

그나마 붓지를 않고 있으니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해 본다.

서울 가는 차 안에서는 내내 뒷 좌석에서 다리를 뻗었다가 조금 굽혔다가 하면서 결국은 서울에도 오고 말았다.

일행들은 나의 페이스에 맞추느라고 하나도 힘이 안 들었다고 하니 뒤집어 보면 내가 그만큼 민폐를 끼쳐서 십이선녀탕을 못가게 된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언제 내가 공언한대로 나도 서북주능의 나머지를 밟고 십이선녀탕을 만나 보아야겠다.

<2008.8.15>

<Helmut Lotti - Adios Muc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