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학벌,파벌…. 모두 '패거리 벌(閥)'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들이다. 이처럼 '벌(閥)'은 어떤 무리 중에 부정적인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 주로 쓰이는 한자다. 그 부정적인 속성이란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챙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이 되는 배척활동을 하는 것 때문에 나타난다. '파벌' 역시 그렇다. 사전적으로는 '개별적(個別的)인 이해관계(利害關係)를 따라 따로따로 갈라진 사람들의 집단(集團)'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뜻이 담겨 있지만,그 속에는 자신의 세력권을 끊임없이 넓히려는 속성이 있음을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출신지역,출신학교,같은 성씨 등을 기반으로 뭉치려는 속성이 강하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동창회,향우회 등의 모임이 수도 없이 열린다.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리를 지어 서로 돕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뭉쳐 '패거리'를 형성해,자기네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이권과 좋은 자리를 나눠 가지는 행태를 보이면 그때부터 그 집단은 사회적 해악이 된다. ○기회 박탈하고 사회 전체의 경쟁력 해쳐 파벌주의의 해악은 '패거리'에 속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쇼트트랙 파벌 갈등에서도 드러났듯,파벌 간 다툼은 대표선수의 선발과 올림픽 종목별 출전 선수를 결정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가장 뛰어난 경기력을 가진 선수를 선발하는 게 아니라 각 파벌이 모두 불만이 없게 적당히 안배하는 과정에서 500m 등 일부 종목에서는 실력이 뛰어난 선수의 출전길이 막히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비단 스포츠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로 실력이 있으면서도 학벌이 딸려 취직을 못한다거나,능력은 되는 데도 '빽'이 없어 출세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패거리주의'의 문제점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한 직장 내에서도 출신 학교별로 패거리를 형성해 승진?인사 등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시도하기도 한다. 이렇다보니 적당한 '패거리'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확실히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상 직장에 들어와서도 승진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패거리주의'는 전체 사회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능력에 따라 취업?승진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벌이나 파벌 등 패거리의 영향력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 반복되면 구성원들은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오로지 자신이 속한 패거리의 세력권 확대에만 몰두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권의 예를 들어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정치가가 이념과 정책의 차이에 따라 각각 다른 무리를 지어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들의 이념과 정책을 펼쳐 보이기 위해 정권을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바로 정당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은 이념이나 정책에 따라 패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 출신 지역별로 나뉘어져 있다. 각각의 지역 보스 밑에 해당 지역 출신 정치인들이 모여 있는 식이었다. 이렇다보니 나라 전체의 살림살이 향상을 위한 정책 대결은 뒷전이고,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공격하는 데만 몰두하는 정치풍토가 오래 지속됐다. 그 피해는 역시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이처럼 사회의 중요 부분에서 패거리주의가 만연하면 사회에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집단의 목적은 '사회적 존경'이 돼야 그렇다고 이미 끈끈하게 형성돼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다 해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연과 교감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집단이 각자 어떻게 사회를 위해 공헌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패거리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클럽'이 그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다. 타향에 나와 있는 같은 지역 사람들로 뭉친 향우회나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로 구성된 동창회도 달라질 수 있다. 일단 본래의 목적에 맞게 집단 내부에서 구성원이 겪는 어려움을 정당한 방법을 통해 상부상조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비록 지금까지는 이런 모임들이 패거리주의의 온상으로 여겨졌을지라도,지금부터라도 집단의 세력권 확대에만 몰두하는 속성을 버리고 집단의 이름으로 사회적 공헌을 하려고 힘쓰면 된다.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말고,'존경'을 받기 위해 뛰라는 것이다. 그러한 '존경'은 구성원에게 크나큰 자부심으로 돌아올 것이다. * 정치판이나 기업의 인사 얘기가 아니다. 지난봄 프로농구팀 감독 선임과정에서 관계자들이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스포츠계의 뿌리 깊은 파벌 문제는 모두 쉬쉬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이다. 파벌은 주로 학연, 지연 내지 특정인에 대한 선호에 따라 갈린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체육계 파벌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선·후배들끼리 끈끈한 응집력을 발휘한다. 선수 스카우트와 대표팀 선발은 물론 협회 집행부 등 행정부문 장악에도 힘을 미쳐 그들만의 아성을 철통처럼 구축한다. 지난 4월 세계선수권대회 직후 안현수 선수의 부모가 공항에서 연맹 부회장을 폭행, 파문을 일으켰던 쇼트트랙이 단적인 경우다. 구타와 훈련거부 등 끊임없이 잡음을 일으켰던 국내 쇼트트랙계는 당시 한국체대와 비(非)한국체대 지도자가 가르치는 선수들이 과잉경쟁을 벌이다가 경기 도중 한 명은 넘어지고 다른 한 명은 실격당하는 불상사를 빚었다. 쇼트트랙뿐만이 아니다. 펜싱계도 한국체대와 비한국체대의 갈등이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올 초 ‘남현희 성형파동’의 이면에는 파벌 간의 알력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 펜싱협회는 표면적으로는 남현희 선수의 무단 성형수술에 대한 책임과 지도력 부재를 이유로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조련했던 이성우 코치를 해임했다. 하지만 이 코치의 해임은 비한국체대 쪽이 장악하고 있는 협회 집행부가 한국체대를 견제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메달종목 탁구도 예외는 아니다.‘장기집권’을 해온 천영석 탁구협회 회장을 끌어내리기 위한 ‘반(反)회장파’와 ‘친(親)회장파’가 지난 5월 정면 충돌했다. 당시 ‘반회장파’에서는 천 회장이 약속했던 출연금을 내지 않았고 대의원들을 무시한 독선적인 운영을 해왔다며 총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천 회장 측은 긴급이사회를 열어 반대파들을 처절하게 눌렀다. 두 달여 동안 대의원 확보경쟁을 펼친 양측의 싸움은 현 집행부측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선수층이 얇은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은 협회의 두 거물 K씨와 L씨 간의 자존심 싸움이 문제를 일으켰다. 각자의 클럽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지난해 4월 동아시아대회 대표선수 선발을 놓고 맞붙었다. 파벌다툼은 메이저 종목도 마찬가지. 국가대표 축구팀의 감독으로 매번 비싼 돈을 들여 외국인을 기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파벌 때문. 토종 지도자는 대표팀 선수를 발탁하는 데 있어서 파벌과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프로농구도 마찬가지다.10년째를 맞은 국내 프로농구에서 ‘OB(졸업생)’들이 실력을 행사,Y대 출신들이 줄곧 감독을 돌려 맡는 구단도 있다. 또한 ‘명장’으로 불리는 A감독은 K대 출신을 드래프트에서 뽑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은 쇼트트랙 파문이 일어났을 당시 “쇼트트랙뿐 아니라 전체 스포츠계의 파벌과 집단이기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겠다.”며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후 넉 달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체육회 관계자는 “스포츠 파벌을 뿌리뽑기 위해 체육회 내부에 관련 부서를 만들거나 현황에 대해 실사를 벌인 적은 없다.”면서 “체육회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채호 선생의 당파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