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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직녀의 오장육보(♬)...
인터넷 문화일보에 실린 이 글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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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시인..."
지난 28일 첫 단체상봉에서 52년 수절 끝에 만난 북측 남편 림한언(74)
할아버지에게 '애인을 만들지 않았느냐'고 따져 화제를 모은 남측 정귀업(75) 할머니가
얻은 별명이다.
첫날(28일) 50여년만의 `바가지', 둘째날(29일) 늙은 신부의
`기습 뽀뽀', 그리고 마지막 날(30일) 재이별의 오열.
민족사의 질곡을 헤쳐나온 정 할머니의 한 서린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어느 시인의 시어보다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정 할머니는 금강산 출발전 지난 27일 속초 한화리조트에서
"가시밭길도 그런가시밭길도 없어라우.
꽃방석 깔아줘도 가지 않을 길을 50년 넘게 훠이훠이 걸어 왔어라우.
눈물을 밥 삼아 살아왔다.
'눈이 높아 못오나 길을 몰라 못오나'라는 노랫말이 내 인생"
이라며 남편과 생이별후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온
52년을회고했다.
`남편을 만나면 먼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기자 질문에
"당신과 나 사이에그런 일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나 세상이 그러니 어쩌겠소. 내 복이 그뿐인디.
사랑했기에 그때 사랑이 지금도 살아 숨쉬는 것같아" 라고 답했다.
28일 저녁 금강산여관의 단체상봉 자리.
할머니는 남편 림 할아버지에게
"당신 나랑 살 때 애인 있었소. 그럼 인간이 아니제" 라며
"만약 당신 남쪽에서 나와 살던 때부터 몰래 사귀던 여자를 데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재혼했다면 용서할 수 없다" 고 52년 동안의
속앓이를 털어놨다.
정 할머니는 또 이날 상봉에서 림 할아버지가
"왜 52년을 재혼하지 않고 혼자살았느냐"고 묻자
"시어머니도 엄마다. 시부모를 버리면 가슴에 벼락을 맞는다" 며
받아쳤다.
이어 29일 오전 금강산여관에서 단둘이 만난 개별상봉.
할머니는 "지금도 못만났으면 내 인생이 완전히 끝날 판이다.
아마 넋새가 되어울고 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넋새에 대해 '한을 담는 새'란 뜻이며 고향 전남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또 개별상봉에 쓰인 방에 있는 침대를 가리키며
"침대도 두개고 방도 혼자 쓰는데 오늘밤 같이 잘 수 없을까?
(방이) 아깝잖아! 누구한테 떼쓰면 될까? 제일 높은 분이 누구야!
김정일한테 얘기하면 될까" 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29일 오후 림 할아버지와 손잡고 금강산 구룡연으로 가는 버스를
나란히 타고 가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하늘과 땅을 합친 것 만큼
좋다. 너무 좋지 엄청 좋지. 그걸 어떻게 말로 다해" 라며 다소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어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그렇게 그리던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구룡연 동승참관을 마친 후 림 할아버지와 헤어지기 직전
"뼈도 피도 안섞인 인연인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
시계바늘이 한 점도 쉬어주지 않아요.
시간은 가고 있어.
내 인생도 가고 있어.
가다보면 아주 가는 날이 있겠지.
그때는 후회없이 가자...
견우직녀는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짝짝 만나지.
인간이라고 태어나서 52년을 (혼자)사는데 오장육부가 얼마나 단단한지.
그래도 오늘날까지 그렇게 애로가 쌓였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대단하지"
라고 상봉 소감을 피력했다.
정 할머니는 30일 오전 작별상봉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같이 찍은
즉석사진을 건네주며 "나 미워하지 말고 사진 내려다 보고 내 생각해.
나도 보고 싶으면 사진을볼거야" 라며 잠시 헤어지는 연인같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다 할머니는 울부짖었다.
"또 이별이냐,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
<연합>
< 2002 년 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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