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씨 일 인 사면에 대하여

그리고 뭔가... 2009. 12. 30. 13:00

참 대단한 결단이다.

좌면우고 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이다.

어떻게 보면 마음 먹은대로 다 하고 싶어 하는 정권 같다.

그동안 외쳐 온 법치주의, 원리 원칙, 아니 상식을 깡그리 도외시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로 속 터질 지경이다.

힘 센 자들이 누리는 권리를 보는 것은 참으로 속쓰린 일이다.

전경련 등에선 기업가들 사면을 요청하였다지만, 정권에선 오로지 이건희 단독사면을 감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소한의 법치'를 위한 변명으로 삼은 걸까?

너희도 이건희 정도로 힘을 가져 봐라...

세종시로의 기업 이전을 빨리 결정하지...

혹시 다른 기업체들을 압박하려는 생각은 없었을까?

법치와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졌던 촛불 시위자에 대한 가혹한 군화발, 구타, 물대포, 연행......

도로로 화염병을 던진다고 해서 신나 병이 가득찬 농성장에 특경대를 투입하여 강제 진입하여 여섯 명이나 죽게 만든 법치주의......

여기에 얼마나 많은일반 시민, 보통 국민들이납득하고 이해할까?

그 뻔뻔한 뒤집기와 궤변에 대해 양식있는 시민들이 언제까지 용납할까?

아무리 조중동 등의 친 정권 수구언론의 여론 호도로 덮는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런 "내 맘대로" 의 "가짜 법치주의" 를 알만한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2009.12.30>

국가이익을 앞세운 강압과 진정한 법치주의를 왜곡하는 사례 [펌]

그리고 뭔가... 2009. 12. 30. 10:41

29일 저녁 7시 30분 <오마이뉴스>와 도서출판 휴머니스트가 공동 기획한 특강 '다시, 민주주의를말한다'의 12번째 강사로 나선 박 변호사는 '민주주의, 일상에서 출발하자'는 주제로 2시간 동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박 변호사는 19세기 말 독일의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수감되었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당시 정치인 클레망소가 한 말을 소개했다.

"국가이익, 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대해 말하지 말라. 자의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늘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며, 국가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이다. 정권이 국가이익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게 마련이다. 만약 그것이 드레퓌스에게 적용된다면 내일 다른 누구에게 적용될 것이 분명하다."

박 변호사는 용산참사를 예로 들면서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법치주의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잊지 않았다.

"그런 참혹한 재개발의 상황에서 누군들 저항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법치주의란 것의 핵심은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의미는 힘 있고,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금방 응징을 받고 감옥을 가는데 안 지킬 도리가 있는가? 그런데 늘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권력자와 돈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기관이, 재벌이 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에 법치주의의 의미가 있다."

[중 략]

또 박 변호사는 "청년들이 공무원이 되거나 삼성그룹에 들어가는 것만 원한다면 대한민국의 희망은 없다"며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돌아보면 세상에는 얼마든지 이웃을 위해 사는 다양한 길들이 열려 있다. 여러 나라를 다녀보니 국가마다 자본주의의 색깔이 다르고 민주주의의 온도가 달랐다. 북유럽과 영국이 달랐고, 영국과 프랑스가 달랐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절대로 공짜는 없다. 그나마 민주주의가 이렇게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땀이 있었는가. 세상은 노력하는 만큼 바뀔 수 있다."

2100 억 짜리 사랑의 교회 건축에 대하여 [펌]

그리고 뭔가... 2009. 12. 21. 11:07
"사랑의교회는 토건 마케팅 교회"
<88만 원 세대> 저자 우석훈 교수, "교회는 사회적 완충 역할 해야"
입력 : 2009년 12월 19일 (토) 10:03:10 [조회수 : 683]이명구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건축을 시작하면서 사랑의교회(목사 오정현)는 '다음 세대와 민족을 섬기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서는 제자 훈련의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공간은 너무 좁기 때문에 건축을 하겠다는 것이다. 교육을 감당할 만한 '크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명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어떨까. 또 교회 건축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무엇일까. 12월 18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2.1연구소에서 환경경제학자 우석훈 교수(<88만 원 세대> 저자·2.1연구소장)를 만났다. '사랑의교회 건축의 사회적, 경제적 의미'와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교회 건축의 의미'를 짚어 보았다.

▲ 우석훈 교수는 사랑의교회 건축에서 대기업의 마케팅 논리를 발견한다고 했다. 건물을 지어 돈을 더 벌려는 것이라는 말이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우석훈 교수는 사랑의교회 건축에서 대기업의 마케팅 논리를 발견한다고 했다. 새로운 CEO가 주주총회에서 이사회를 잘 구슬려서 전과는 다른 공격 경영에 나선 것이고, 이 형식은 토목건축이라고 했다. 건물을 지어 돈을 더 벌려는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마저 자본주의의 대원칙인 '경쟁'을 가속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종교가 가지는 사회적인 완충 역할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품어 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은 더욱 따가워질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사랑의교회 건축을 어떻게 보는가.

생태적이지도, 문화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것 같지도 않다. 건물을 짓는다는 건 더 커지기 위해서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성경하고 아무 상관없는, 세속의 대기업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건물은 목표가 아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무엇을 위해 늘리는 건가. 내가 보기에는 건물 짓는 게 목표인 것 같다. 더 커져서 더 교인 수를 늘리고, 돈을 더 벌겠다는 거 아닌가.

사랑의교회 건축이 한국 사회에 어떤 파장을 주리라 보는가.

▲ 우 교수는 "생태적이지도, 문화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것 같지도 않다. 건물을 짓는다는 건 더 커지기 위해서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명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지금 사회에서 존경받는 대상이 아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성'과 같다. 누가 감히 교회가 하는 일에 뭐라고 하겠는가. 어쩌면 신의 마음을 사는 것보다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건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이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탁하고 싶고 어려우면 손을 벌리고 싶은 교회여야 한다.

사랑의교회는 인원이 많아서 장소가 좁은 불편함을 10년간 감수해 왔다.

공간이 부족한 것은 알겠다. 좁은 공간 자체가 교인 수를 적절히 조절하는 거 아닌가. 정 많아서 불편하다면, 나눠서 조그맣게 하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길을 찾지 않은 거 아닌가.

사랑의교회는 옥한흠 목사 때 몇 번이나 건축을 미뤘던 적이 있다. 담임목사가 오정현 목사로 바뀌고 5년 뒤 건축을 시작했다.

경영 방침이 바뀐 거 아닌가. 새로운 CEO가 주주총회를 열고 이사회를 잘 구슬려서 전과는 다른 공격 경영으로 나선 것이다. 그 형식은 토목건축이다. 건물을 지어 돈을 더 벌려는 것 아닌가. 아예 사랑의교회라는 간판 내리고 토건 마케팅 교회로 바꿔라.

사랑의교회는 교회 건축을 통해 '다음 세대와 민족을 섬기겠다'고 했다.

그런 명분으로는 사회를 설득하기 어렵지 않겠나. 더 커져서 더 큰 일을 하겠다는 논리에 사회의 시선은 냉랭할 것이다. 사랑의교회 건축이 명분이 없는 일이지만, 딱 한 가지 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돈이 나랏돈이나 강도질한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분도 없고, 절차상 설명도 별로 없고, 내 돈이니깐 내 돈 쓴다는 논리에 한국 사회가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건축을 결정하면서 공동의회를 거치지 않았다. 당회나 제직회의 결의로만 건축이 결정되고, 교인들에게 헌금 약정 주일을 선포했다.

의사 결정 과정도 기업 논리와 똑같다. 민주주의의 1인 1표제와 달리, 기업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1원 1표제다. 주식을 소유해야, 돈이 많아야 의사를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성경의 논리라면 누구나 동등해야 하지 않나. 힘 있는 일부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하는 1원 1표라면 성경의 원리에 위반되는 거 아닌가.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 특히 기독교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는 경쟁을 강화시킨다. 이 폐해를 완화시키는 장치는 종교밖에 없다. 시장의 낙오자와 약자를 도와주고 세워 줘야 하는데, 지금 교회가 가는 방향은 자본주의가 가는 방향과 딱 맞는다. 사랑의교회가 토건에 몰입하는 것은 결국 교회도 경쟁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맘몬의 방향이다. 성경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나와 있지 않는가. 세상과 똑같이 가면 종교가 무슨 필요인가. 돈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지 않나.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그런 이야기를 한 거 아닌가. 한국 사회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것은 예수가 한 대로만 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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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의 서동진 목사의 글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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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가 제시한 교회 건축의 필요성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당이 성도들의 수를 다 수용할 수 없다. 둘째, 건축을 하지 않으면 2,000억 원을 모을 수 없다. 인프라를 위해서 투자하고 인프라를 바탕으로 하나님나라, 사회, 선교, 다음 세대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건축 비용을 다른 곳에 쓴다는 것은 일리가 없는 말이다. 셋째,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다. 교회가 커야 세계를 흔들 수 있다. ('사랑의교회 건축, 옥한흠 목사의 진짜 생각은?' 참고)

첫째, 예배당이 성도들을 다 수용할 수 없다.

옥한흠 목사가 말한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건축을 시작할 때 제일 처음 말하는 명분이 바로 '교회가 포화 상태이다'라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건축에 동의한다. 그리고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성도들의 수가 차고 넘쳐서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는데, 왜 반대를 하냐?"라고 말을 하면서 비난하고 정죄한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는 이미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내놓았다. 은퇴 후 옥한흠 목사는 '교회를 키운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라고 했고, 많은 사람들을 이 말에 대해서 '교회를 분립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라고 해석했다.

그렇다. 교회가 포화 상태이면 교회를 분립하면 된다. 분립을 통해서 포화 상태가 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교회가 새 교회를 건축하는 것보다 분립을 통해서 건강한 교회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둘째, 건축을 하지 않으면 2,000억을 모을 수 없다. 인프라를 위해서 투자하고 인프라를 바탕으로 하나님나라, 사회, 선교, 다음 세대에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다. 건축 비용을 다른 곳에 쓴다는 것은 일리가 없는 말이다.

지금까지 사회에 무관심해 온 교회가 인프라를 형성한 후에 사회에 공헌을 하겠다는 말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100만 원 버는 사람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면, 1,000만 원을 벌어도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 사랑의교회가 지금보다 거대한 교회가 된 후에 이웃을 돌보겠다는 말을 신뢰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셋째, 큰 국제화 시대이다. 교회가 커야 세계를 흔들 수 있다.

큰 교회가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초대교회는 수만 명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120명으로 시작했으며, 전 세계를 변화시켰고, 변화시키고 있다. 교회는 오히려 로마의 국교가 되어 거대해졌을 때 타락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했다. 그리고 세계를 흔들고 바꾼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이었지 결코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큰 교회가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며,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이다.

사랑의교회가 2,100억을 들여서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메가처치 논박>의 저자 신광은 목사는 사랑의교회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수십 년 후에 미래의 사랑의교회 중직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1985년에도 새 교회를 건축했고, 2009년에도 새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 교회를 건축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미래에 스가랴 선지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지난날 거대한 교회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위함이었느냐?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 의롭고 올바른 재판을 하여라. 서로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과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마라. 다른 사람을 해칠 마음조차 품지 마라."

[스가랴의 원문: 7장 5절~10절]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 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 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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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축을 위해선 2100 억이 모이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을 위해서는 돈이 모이지 않는다라는 건축 설득논리를 보고는 기도 안 찬다.

안 모이면 모이게 해야 할 것 아닌가?

건축을 위한 작정 헌금을 하게 하면서, 구제를 위한 작정 헌금은 시켜보았는가?

결국 안 모인다는 논리란 게 '안 모으겠다' 라는 말 이외에는 무엇이겠는가?

목사의 최대관심사가 건축에 쏠려 있다는 반증 말고는 달리 없다.

<2009.12.21>

용산참사를 공자가 봤다면? `當仁不讓於師` [펌]

그리고 뭔가... 2009. 12. 5. 17:40
<춘추>가 칭송한 반역 행위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기 입장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내게 맞서면서까지 자기 입장을 지켜야 한다고. 후세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한 마디였다.

"인간성의 기본 원리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는 너희 스승에게라도 굽혀서는 안 된다." (논어 권15 子曰 當仁 不讓於師)

임금의 명령을 명백히 어기고 이적 행위를 저지른 한 장군을 <춘추>의 필자가 왜 칭송했는지 동중서가 질문 받은 일이 있다. <춘추>는 유가 전통에서 확고한 도덕적 권위를 가진 경전이었다. 이런 책에서 어떻게 임금의 권위를 참월한 행위를 칭송할 수 있는가?

문제의 사건은 춘추시대 역사 속에 잘 알려진 것이다. 초나라 왕이 포위하고 있는 지역의 정보를 수집해 오라고 장군 자반을 송나라 도성에 보냈다. 자기 쪽에도 군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 쪽에 얼마나 버틸 힘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반이 송나라에 가 보니 참혹한 상황이었다. 극도의 기아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끼리 자식을 서로 바꿔서 잡아먹는 지경이었다. 충격을 받은 자반은 그들을 구해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왕에게 돌아온 자반은 자기가 적군에게 초나라 군량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보고했다. 왕은 포위를 풀고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 왕이 자반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자반이 쓸모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적을 도와준 인물을 역사가가 칭송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질문에 동중서는 대답했다.

"극도의 참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성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예법이 정한 바를 얼마간 제쳐놔도 된다고 동중서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인(仁)을 숭상하는 자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어질게 대하려 한다. 어진 사람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른다. 자반이 송나라 사람들을 어질게 대한 것은 자기 마음의 끌림에 따른 것일 뿐이며, 따라서 남들이 자기 행동을 일종의 반역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자반에 대한 옹호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중서는 공자를 인용했다.

"인간성의 기본 원리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는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된다."

공자의 이 한 마디가 어떤 위험을 품고 있는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특히 맥락에서 벗어나 단편적으로 인용될 때, 사람의 마음이 최고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공자의 뜻도 아니고 동중서의 뜻도 아니다.

동중서의 마음에는 체제를 부정하는 뜻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자반처럼 송나라 사람들의 참상을 분명히 알면서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불쌍한 사람들을 더 괴로운 지경으로 몰아넣도록 군대를 움직여서야 되겠는가? 그런 사람은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마음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도덕적 문제에 감정이 개재되는 것을 그가 조심스러워 한 것은 감정이 판단력과 성찰력에 맞서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제자 자장에게 이렇게 말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비방과 마음을 찌르는 저주에 곧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 가히 밝은 분별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논어 권12 子曰 浸潤之讒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제자들이 감정의 충격 앞에서 지킬 수 있기를 공자가 바란 것이 분별력이었다. 훌륭한 제자라면 스승이 자신과 다른 관점을 내놓을 때 스스로의 명징한 판단에 의거해서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스승이라면 제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인정하고 제자가 자기 길 가기를 바라야 할 것이었다. 이 모순을 공자는 수긍했다.

- 안핑 친(Annping Chin)의 <공자 평전(The Authentic Confucius)>(돌베개 근간) 중에서.


인간은 사회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어느 사회에나 나름대로의 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는 다른 동물들의 사회보다 훨씬 복잡하다. 문명 때문이다.

개미와 벌처럼 사회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을 보면 그 질서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개체들의 본능 차원에서 대충 운용되는 이 질서를 '자연적 질서'라 할 수 있다. 질서를 구성하는 가치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가치 선택의 압박 속에 살아간다. 포유류 동물의 경우 곤충류보다는 깊은 갈등을 많이 보이지만, 인간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르다.[프레시안]

<2009.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