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서울 무지개

기본카테고리 2010. 8. 11. 11:56

4 호 태풍 "뎬뮤" 가 지나가면서 어제 8.10 일에 서울에 비가 많이 내렸다.

은평구에는 국지성 호우가 내려서 사고가 나고 홍제천에는 택시가 빠져서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광호와 상익이 하고 스크린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라서 자양동으로 가는 길에 날씨를 보니 목동교에서 여의도 쪽인 동쪽이 밝다.

비는 가랑 가랑하는데 해가 나니 오랜만에 만나는 여우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이런 날에는 무지개가 잘 떴는데...하면서 앞을 보니 과연 무지개가 뜨기 시작한다.

옅은 윤곽이 조금씩 진해지는 것을 보니 그렇다.

아내에게 전화하니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무지 바빠서 전화를 제대로 못 받는다.

그래서 무지개가 떴다는 것을 알려 주니 바쁜 와중에 "정말! 저기 있다"하고 확인하고 같이 있던 계수씨에게 막 전파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릴 적엔 흔히 보던 무지개를 실내 생활을 많이 해선가, 맘 속에서 무지개가 없어졌는가, 아예 무지개 자체가 잘 안 뜨는 건지 어쩌다가 무지개를 보면 그냥 아련해지고 약간 흥분이 된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고 있다가 찾은 느낌이다.

서울교에서 동쪽으로 가는 올림픽대로에 접어 들면서 빈 터가 있어 차를 잠깐 세우고 사진에 담았다.

몇 몇 사람들도 무지개를 찍으려는지 차를 세우고 있다.

도대체 무지개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한 징표라는 무지개....정말 물로써는 심판이 없을까?
내 앞에 있는 무지개는 저 건물로 들어 간 것 같다.


<2010.8.11>

2010 상사화

기본카테고리 2010. 8. 11. 11:40

매일 마당을 내다 보고 둘러보기도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상사화가 피었다.

난 몰랐는데 아내가 노원교회에 갔다 오는 차 안에서 휴대폰 앨범을 열어 보여 주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상사화......

"고향집?" 하면 떠 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시골 집 사랑 변소 가는 길 한 귀퉁이의 초록빛 이파리 무데기이다.

봄에 잎들이 먼저 났다가 조금 지나면 어느 사이엔가 잎은 없어지고 꽃대가 올라와서분홍색 꽃을 피우곤 하였다.

봄 방학 때는 이파리를 보았고, 여름 방학 땐꽃을 본 기억이 난다.

잎과 꽃이 났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고 하여 "상사화"라고 한다는 것을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만,

우리고향에선 그냥 "난초"였다.

난초 종류엔 군자란 양란 동양한 풍란 등...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우리 동네에선이것이 난초의 대명사였다.




저 긴 꽃 대궁이 언제부터 올라 왔을까? 어느날 갑자기.....몇 밀리부터 시작하여 몇 십 센티까지 천천히 자란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날 갑자기 쑥 올라온 것만 같다. 앞의 맥문동 보라꽃 줄기는 또 얼마나 대견한가.


안방에서 내다 보이는 상사화, 맥문동꽃, 이름 모르는 콩과 식물의 넝쿨,모란 잎새가 우리 마당의 다양함을 보여 준다.


가느다란 수술 몇 가닥과 한 가닥의 긴 꽃 술이 특이하다.


<2010.8.11>

기독교 망친 건 사랑없는 기독교이다 [펌]

기본카테고리 2010. 8. 7. 14:43

영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문화이론가 테리 이글턴(사진)이 쓴 <신을 옹호하다>는 제목만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책 같다. 종교인·신앙인이라면 신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이 책의 포인트는 부제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에 있다. 통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신론자=유물론자’로 통하는데, 마르크스주의자가 무신론을 비판하고 신을 옹호한다는 사실이 이 책을 눈에 띄게 만든다. 지은이 이글턴이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기독교인이다. 그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 원초적 환경이 그대로 그의 정신세계의 뼈대가 된 셈이다. 이 책에서 이글턴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걸고 무신론을 비판한다. 2008년 4월 미국 예일대에서 했던 특강이 이 책의 바탕이 됐다.

이 책의 또다른 포인트는 이글턴이 비판하는 대상이 명성에서 이글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와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정치적 스펙트럼상 ‘진보적 자유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도킨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조지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히친스도 헨리 키신저를 베트남·캄보디아 민간인 학살의 전범으로 재판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키신저 재판>을 썼다. 이 두 사람은 강경한 기독교 비판자라는 점에서도 유사한데, 도킨스는 2006년 <만들어진 신>을 출간했고, 히친스는 2007년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펴냈다. 두 사람은 여기서 기독교가 저지른 잘못과 종교가 지닌 불합리성을 가차없이 성토했다. 얼마나 강력하게 비판했던지 “반종교적 광기를 내뿜는 도킨스 앞에서는 종교재판소장이 무기력한 자유주의자로 보일 지경”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맹렬해진 미국 안 기독교 근본주의 창궐에 대한 비판의식이 이런 종교 비판으로 나타났던 것일 터인데, 이글턴은 이들보다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관점에서 두 사람의 종교 비판이 지닌 문제점을 반비판한다.

» 테리 이글턴 문학비평가·문화이론가

그렇다고 해서 이글턴이 도킨스와 히친스의 모든 비판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기존 종교에 대해 퍼붓는 비난 중 아주 많은 부분이 지극히 옳은 소리며, 종교의 문제점들을 그토록 설득력 있게 제시한 데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마땅하다.” 문제는 이들이 종교에 관해 어이없을 만큼 무지한 상태에서 열변을 토한다는 데 있다. 이글턴은 “<영국 조류도감>을 어쩌다 좀 들여다봤다고 해서 생물학의 심원한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오만”이라고 비판한다. 또 두 사람의 신학 이해가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어떤 소설에 대해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무서운 부분도 있는데 끝에 가서는 무척 슬프다는 식의 평을 해놓고는 문학비평가를 자임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꼬집는다.

그렇다면 이글턴이 생각하는 신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통상의 기독교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신을 제시한다. “예수가 ‘아버지’라고 일컫는 이 존재는 심판자가 아니고 가부장도 아니며 비난하는 자도 아니고 초자아도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이고 친구이며, 함께 비난받는 피고이고 우리를 비호해주는 변호사다.” 그렇다면 심판자·비판자 하느님은 누구인가. 지은이는 그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이를테면 못되게 구는 힘센 왕초로 해석된 하느님이다.”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회주의 운동 창시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다. 예수는 “성경에서 ‘아나빔’이라 부르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 죄로 “고문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로마는 정치범만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바울의 서신에서 아나빔은 세상의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뜻한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 쓰레기, 그러나 하느님 나라로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회주의 운동 창시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다. 예수는 “성경에서 ‘아나빔’이라 부르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 죄로 “고문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로마는 정치범만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바울의 서신에서 아나빔은 세상의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뜻한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 쓰레기, 그러나 하느님 나라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인간 세계에서는 주춧돌 구실을 할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를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로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는 문제다.”


이글턴은 자본주의가 기독교와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실상 자본주의야말로 그 본질상 무신론적이라고, 그것도 “한결같이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경건한 태도로 뭐라고 주장하든 간에, 현실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행태와 거기에 내재된 가치관과 신조들은 신을 부정한다.”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려면 이 무신론적이고 사랑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이글턴은 도킨스와 히친스가 19세기 계몽주의자·합리주의자들의 단순한 이성주의에 입각해 종교를 미신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세속의 시대>에서 한 주장을 받아들여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과학적 증거가 꾸준히 축적된 결과로 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 패퇴했다’는 닳고 닳은 신화, 경이로우리만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신화”를 단호하게 반박한다. 이런 신화 속에서 “‘믿음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 앞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러나 자기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이성이란 또하나의 극단, 일종의 자기도취일 뿐이다. 도킨스와 히친스는 “우리가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 자체가 신화다.” 지은이는 도킨스와 히친스의 종교 비판에 맞서 이렇게 선언한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

한겨레신문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

<20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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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을 따르는 디자인 수도[펌]

기본카테고리 2010. 8. 4. 15:36

내가 살고 있는 홍은동의 집은 내가 삶의 질과 관련해서 늘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요소이다.

나의 앞 마당에서 사계절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 어릴 적 고향의 자연을 생각나게 하면서 더욱 기분좋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모른다.

내 집에 오세훈 식 디자인 서울을 대입하면 어떤 그림이 될까?

노랗고 빨갛고 파란 각지거나 눈을 현란하게 하는 곡선을 넣은 담장...

잡풀들은 철저히 뽑아 없애고 갖가지 꽃들로 모양낸 화단을 만들까?

듬성듬성 보이는 흙엔 틈 한 뼘 허락하지 않고 잔디를 빼곡하게 심을까?

달개비나 명아주 반하 싹같은 것은 보이지 않도록 제초제를 칠까?

볼거리나 제공하는 디자인서울을 내 집 마당에 들여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선악과....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그렇게 만드느라고 수 조원의 빚을 지고 있는 서울특별시를 생각하면 저절로 답답해 온다.

나는 어설픈 우리 집 마당이 정말로 좋다.

빚가리를 위해서 집을 매물로 내 놓았는데, 아내는 9억에, 나는 10 억에 내 놓자고 했지만 공통적인 것은 팔고 싶은 생각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165평 연희베버리힐즈 빌라와는 추호도 바꿀 생각이 없는 집이다.

뭐 바꾸자는 사람도 없지만....

한겨레신문에 디자인수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삶의 질과 연관지은 기사가 있어 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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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수도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게 산업·실내 디자인 중심이라 정작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인데 말이예요.”

니얼 커크우드(58·사진)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 교수가 지난 6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며 바라본 ‘디자인 서울’에 대해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지난 2월고려대 초청 석좌교수로 한국을 방문해 한 학기 동안 고려대에서 조경학과 건축학 등을 강의한 뒤 3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번 방한이 14번째일 정도로 그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다.

지난 2일 고려대에서 만난 커크우드 교수는 한국의 계절과 자연에 대해서는 감탄을 연발하면서도,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서는 “공사 등으로 복잡하고, 유지비용이 많이 들며, 어설프게 겉모습만 서양 문화를 따라하는 게 아쉽다”고 털어놨다. 특히 서울시가 추진하는 ‘디자인 수도’ 사업에 대해 “사람이 살기 알맞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실내’가 아니라 ‘바깥 환경’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구호는 현실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커크우드 교수는 “우리는 파리에서 멋지게 디자인 된 건물이 아니라 거리의 분위기를 감상하는 것”이라며 “도시를 만드는 건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바로 시민들이며, 이 때문에 거리와 공적인 공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시는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이기 때문에 도시는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조각물에 머물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높은 건물과 여기저기서 계속되는 공사, 예술작품처럼과잉 디자인된 거리가 그 자체로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이 되어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국가대표 광장’이라 거론되는광화문 광장을 두고도 “지나치게 디자인되고 장식된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이라고 평가했다.

커크우드 교수는 또 “항상 사람을 중심에 두고 그들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한 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시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속가능한 도시가 되려면 ‘삶의 질’이 매우 중요하고, 이것이 서울 도시계획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는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자연환경에 대한 정비’로만 이해한 채 정치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며 “정말 필요한 건 사람들이 어떻게 도시에서 이동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밥을 먹고, 편안함을 느끼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삶의 질’은, 한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삶의 질을 되찾는 방향으로 도시를 디자인 해서 잃어버린 것들을 꼭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201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