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병

그리고 뭔가... 2005. 4. 13. 19:15

우리에겐 이미 미국에 대한 환상은 없습니다.
한국 민중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폭압을 맞았을 때 하나의 환상을 갖고 있더랬습니다만.
미국은 인권보호국가 이므로 독재자의 탄압에 제동을 걸 것이라고......

광주 민주화운동 때 미국의 항공모함이 한반도에 가까이 왔을 때엔
이 환상의 극을 보았습니다.
미국이 전두환 군부세력을 몰아내 줄 것이라고도 .....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것은 미국이 방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운동권과 지식인 층에선 한국의 분단과 독재정권의 장기화에
미국이 주도적으로 역활을 했거나 배후로 작용했거나 묵인 방조함으로써
독재정권에 협력했다는 것을 진실로 인식하였지요.
그 후 들불처럼 일어난 반미 구호가 섞인 시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그것으로는 미국과 독재정권의 그 강고한 고리를 도저히 깰 수 없다는
인식에서 벌어진 학생과 노동자들의 분신 사태들......
이들의 처절한 피흘림이 없었다면 아직도 우린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
천사의 나라, 사랑의 나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난 그래서 지금까지도 김지하의 "굿판을 걷어라" 하며 분신을 꾸짖은
그의 "생명철학"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진정성이 없는 꽹과리로 봅니다.
춘원의 "사랑" 처럼.....

이 이야기 부터 꺼내는 것은 미국은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을 상대로 우리가 우리만의 정의와 명분을 지킬 수 없는 현실이
엄존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호방위조약으로 묶여 있는데다가 한반도 내에서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미국을 상대로 하여 혈맹임을 내세워 미국의 참전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늑대가 시내물에서 물 마시고 있는 새끼 양을 잡아 먹으려면 어떤 이유로든 잡아 먹을 수 있습니다.
정몽준이는 투표 열 시간 전에 "미국은 우리의 우방인데 북과 미국 사이에서
우리가 중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공조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국민들을 상대로 하여 맺은 후보자 간의 약속을 파기할 수 있는 빌미의
내용으로써 작용하는 대미관계가 제공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이러한 나라의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정당이래야 고작 국회의원 110여명의 소수정당이라는 현실,
국회 절대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주의적 수구정당의 존재,
이들은 최대한의 조기파병과 전투부대의 파병을 주장하고 있지요.
신문 여론 시장의 75%를 수구언론, 분단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통령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방지",

아니 "남북한 간의 동족상잔 반대"라고 하는 것에 이의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국익이라는 말에 상대적인 많은 요소들을 감안할 수 있는
운신의 틈이 대통령에게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국익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라크 전이 끝나고 나서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한다고 할 때
남한의 반대에 동조할 외국이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의 국익을 보호하자고 미국의 부도덕한 침략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이라크를 초토화시키고 이라크 국민을 죽이고 고통주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 옳은가,
이 참전으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공격하자고 할 때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억제력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가,

국민적인 반전과 평화 의식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인데
이를 거부함으써 생기는 우리 내부의 갈등과 분열은 어떻게 할까,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해 놓고 국민 여론은 이렇게 무시할 수 있나,
이상과 인도주의를 말하면서 참전을 선택하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나,
이상을 유보시킬 수 있는 현실의 엄혹한 무게란 어느 정도여야 하나,

어느 것 하나 흑백을 가르듯이 쉽게 결정할 수 있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고려를 넘은 고뇌를 했을 것이며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서 판단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종주국 혹은 강대국이었던 중국 대륙의 패자들과 관계했던
사례들을 떠 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구한말, 열강에 둘러 싸인 조선을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요.
대의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했을 우리나라의 역사를

떠 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이해"를 하려 합니다.
비록 노사모에 가서 "참전반대"에 클릭을 했지만 내가 뽑은 대통령의 이번 판단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명분의 땅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해 나가기' 를 희망합니다.
전투병이 아닌 것에 조금 안도하고, 이라크 민중에 대한 학살이나
탄압 같은 것엔 참여하지 않을 것을 믿으며......

그러나!

모든 전쟁이 비극이고 모순이고 아이러니이지만 이번 전쟁은
더 그렇다는 것에 당혹과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빨리 끝나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과정이란 게 이라크의
빠른 초토화와 조기 항복을 의미한다는 것에 선뜻 맘이 가지도 않고
이라크의 대미 항전이 오래 가고 효과적이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 과정과 결과란 게

결국 더 많은 인명 피해와 세계경제의 파탄과 우리경제의 침체라는 걸 맘에 걸려 하고......

결국! 결론은 딱 한 가지......
전쟁은 없었어야 한다는 거지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감독상을 받은 마이클 무어가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부정한 선거 부정한 대통령 부정한 전쟁....."
"부정한"이 정확한지, "허구적"이라고 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구요.
대통령을 잘못 뽑은 미국, 수 많은 기권자들이 생각 났고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젊은이들의 대량 기권으로
가능했던 우리나라의 정치판도도 생각 났습니다.
좀 더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주류를 이뤘다면 아마 노무현은 파병을 결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한반도에 닥칠 수 있는 미래의 결정적인 위기에서
우리가 미국을 향해 "한반도에선 결코 전쟁은 안된다!"라고
할 수 있고,이렇게 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2003 년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어딘가에 올렸던 글>

낙화 - 조지훈

기본카테고리 2005. 4. 13. 19:03
낙 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영화 Girl on the bridge 감상...고통과 환희를 같이 느끼게 하다

흔한 생각과 취미 2005. 4. 13. 19:01

.........................................................
언제부턴가 비디오 한 편을 끝내기가 어렵다.
비디오를 볼 시간은 밤 시간 밖에 없는데, 늦게 들어 가면 잠 시간이 모자라 바로 자게 되고,

모처럼 일찍 귀가하면 그간 모자랐던 잠 보충하자는 생각에 일찍 자려 한다.
그러다가 요새처럼 열대야로 인해 잠을 못 이루게 되면 그야말로 한 편을
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딱 이틀 안에 완전시청을 이룬 영화 한편이 있으니 바로 '걸 언더 브릿지'이다.

이 영화는 이태리 흑백영화 같다.
나는 대사를 갖고는 이태리 영화인지 프랑스 영화인지 잘 구별이 안 된다.
좀 보다가 엉뚱한 대사나 행동, 소품이나 엑스트라가 등장하게 되면,
프랑스 영환가 보다 하게 된다.
이 영화는 내가 보기에 이태리 영화임에 분명하다.

왜 컬러시대에 흑백으로 찍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영화에 빠져들면서 흑백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 모른다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는 흑백을 잘 맞췄다고 본다.

주인공은 단순한 짝이다.
서커스에서 사람을 과녁으로 하여 칼을 던지는 남자와,
그 사람의 과녁이 되는 여자.

영화는 이 여자가 여러 사람에게 둘러 싸여 자신을 회상하는 씬부터
시작되는데, 어째서 이 여자가 진술하듯이 회상을 하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해하기 위해 역탐색을 한 결과 알게 된 것은
여자의 머리 모양이 평범하고 무뎌보이는 머리 모양이었고- 뒷 부분에서의 머리 모양은

아주 샤프하고, 개성있는 짧은 커트 모양- 진술의 내용이란 것이 자신은 아주 재수없고,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는 여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하기 위하여 어떤 다리 위의 난간에 올라 서는 것으로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번지점프대 끝에 발끝이 약간 나가게 걸치는 것처럼 조금 조금씩 발을
밀면서 떨어지려다 -내가점프대에서 그러다가 두 번 째에 점프한 적이 있다- 잠깐 숨을 고르는 순간,

아저씨 한 사람이 나타나 김을 뺀다.
얼굴 윤곽이 뚜렷하여 코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고 강인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다.

'왜 망설이느냐', '다리에서 떨어지면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고 하면서...
여자는 좀 창피하고 아니꼬운 표정으로 변명한다.
'물이 너무 차가울 것 같다 ' 고.....

남자가 자기는 서커스에서 사람을 과녁으로 하여 칼을 던지는 묘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기왕에 죽을 것이라면 자기를 도와서 일을 같이 하자고 한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자극하는 몇 마디를 더 던지자, 여자는 그냥 강물로 점프한다.
남자는 '이런, 정말 뛰어내리다니' 하면서 뒤따라 뛰어 내린다.
둘은 물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순시선에 의해 구조되고 병원 응급실로 이송된다.

이후로 둘은 서커스에서 칼을 던지고, 과녁이 되는 일을 하게 된다.
약 12자루의 단도가 하나씩 하나씩 여자 몸 주위에 날아가서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박힐 때마다 여자는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이상한 쾌감에 웃음을 짓는다.
이 배우의 양극적인 감각 연출은 두고 두고 뇌리에 남는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토로한다.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느껴본 적이 있는가 라고......

머리 위, 얼굴 양옆, 가슴 양옆, 허리 양옆, 허벅다리 양옆, 다리 양옆,
가랑이 사이에 꽂히는 단검들.....
실패하지는 않지만, 끝나고 나면 작은 상처가 팔 다리에 하나씩 생긴다.
두 남녀 사이에는 생사에 대한 교감과 일치가 확인되고, 쌓인다.
이는 흔히 이루어지는 섹스가 주는 쾌락과 일체감이 아니며,
이들은 성적인 접촉을 전혀 나누지 않는다.
반대로 여자가 틈틈이 다른 남자와 성적 관계를 나누지만,
남자는 질투의 감정이 생기면서도 주의만 줄 뿐 제지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의 교감과 일치로써 이 일을 발전적으로 계속해 나간다.
즉, 여자를 세워 놓고 커텐으로 두어겹 가리고 난 후 남자는 칼을 던지기도 하고,

회전시켜 가면서 칼을 던지기도 한다.
남자의 긴장은 도를 더해 가고 여자는 공포가 주는 고통과 환희에 떤다.
둘 간에 보이지 않는 대화의 깊이도 한층 깊어진다.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자신의 영감을 키우고, 여자는 남자의 부추김에
따라 자신을 키워 가다가 카지노에서 엄청 많은 돈을 따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노상 음식점에서 아주 핸섬하고 젊은 사내가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 여자가 맘을 뺏기는 것을 안 남자가 기차 시간을
알려 주면서 역으로 혼자 온다.
기차 플랫홈에 몇 개의 궤짝짐이 쌓여 있고,남자는 선로를 걸어 간다.
앞에서 열차가 나타난다.
남자는 피하지 않고 계속 걷는다.
부딪칠 듯이 가까워 오자 남자가 " 뒤" 라고 중얼거린다.
그 순간 열차는 다른 선로를 통하여 오른쪽으로 비켜 나가 버린다.
남자가 다시 "앞" 이라고 중얼거리니, 여자가 앞에 딱 나타난다.
여자가 자기 타입이 아니라며 그 젊은 아이를 버리고 남자에게 온 것이다.

둘은 강하게 포옹하며 역 근방의 어떤 헛간을 찾아간다.
헛간은 어두웠으나 나무 벽 사이로 햇빛이 화살을 이루며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이란 빛의 화살이란 뜻인가 보다.
아주 깜깜하지는 않았지만, 어둑어둑한 공간에 들어와 가로 혹은 세로로
가로지르는 빗살들.....
'음...드디어 얘들이......'
그러나 여자가 겉옷을 벗고 벽에, 사이사이로 통과해 들어오는 햇살로 뚫린 그 벽에 서면서부터

나의 상상은 어긋났다.
남자는 가져 온 칼들을 옆에다 내려 놓고는 신중한 자세로 칼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공간은 나무벽 사이를 뚫고 들어 온 햇살......
바깥의 밝음을 뒤로한 채 서 있는 여자 몸의 어두움과 여자를 가르는 햇살....
남자의 얼굴에도 그 빛 화살들이 비치고 어른거린다.
딱! 딱! 거리며 박히는 단검들의 소리......
여자의 공포에 떠는 모습, 쾌감에 떠는 표정과 몸짓들.....
기다림이 만드는 고요와 긴장.....
불안과 성취감이 교차하는 여자의 얼굴.......

난 이 장면이 이 영화를 흑백영화 아니면 안 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공포와 기쁨, 고통과 환희, 긴장과 허탈, 기다림과 맥풀림.....
철저하게 이분적이고, 양극적인 존재와 인성에 대한 관찰......
그리고 조화와 절제에 대한 갈증과 기아감의 표출이라니.....
칼 던지기 일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 사람의 탁월한 선택과 결정.....

남자는 일관되게 여자를 사랑하고, 자신의 영감과 교차시키려 노력한다.
그러나 여자는 여기에 안주하지 못한다.
남자는 수시로 여자로 하여금 행운을 시험해 보게 하고, 행운의 결과를
확인시킨다.
심지어는 마술사의 트릭까지 사용하여 여자 자신을 행운녀로 만들어 준다.

여자는 우연히 줏었던 고급라이터의 임자인, 막 결혼한 갑부를 유람선에서 만나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도피행을 결행한다.
남자의 말리는 말에 여자는 이제 자신의 외로움을 끝내 줄 사람이라고
하며 듣지 않는다.
"여태까지 침대에서 내게 오른쪽에 누울 것인지 왼쪽에 누울 것인지를
묻는 사람은 당신과 이 사람 뿐이었다" 고....
남자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여자는 떠난다.

그리고 그 사내와 멋지게 춤추던 막 결혼한 여인은 울부짖다가 배 난간에 올라서서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기왕에 죽을 바에야 일을 같이 하지 않겠는가?" 라는 남자의 제의에 여인이 응하여 과녁이 된다.
여인은 공포와 쾌감에 의해 몸부림 치고 신음을 하다가 결국은 허벅다리에 칼을 맞고는

언제까지고 멎지 않을 듯한 비명을 계속지르다가 후송된다.
이건 결국 사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부분이다.

바람둥이 사내가 맞을 칼을 왜 이 여인이 대신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앞 뒤 연결이 되지 않는다.
섣부른 복수? 관객에 대한 써비스?

일엽편주로 바다로 나간 두 남녀는 표류하다가 헬기에 구조되고,
그 사내는 응급요원인 해군인지 공군인지 모를 여인에게 마음을 뺏기고는
여자를 차버린다.
그래서 여자는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버려서 남자를 그린다.
거리에서 세장 카드로 연출하는 야바위를 만나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지만 실패한다.
여기도 내가 보기엔 사족이다.
혹시 헛간에서의 칼 던지기 장면까지의 감독과 그 후의 감독이 다른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남자는 텔레파시로 여자를 계속 부른다.
"거기로 오라"
남자도 결국 짚시처럼 방황하면서 어느 거리 시장에서 칼을 팔려고
좌판을 벌리고 있다가, 여자의 뒷 모습을 보고 쫓아 가다가
트럭에 치었지만,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확인하니 다른 여자다.

좌절과 절망에 빠진 남자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 절룩거리며
한 다리 가운데에 서 있다.
다리 난간 밖으로 몸을 이동시켜 난간을 잡은 손에서 슬슬 힘을
빼고 있으려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왜 여러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하느냐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여자다.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한다.
실은 첨 만났을 때, 자신도 죽으려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불운이 계속되어,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당신을 만나 운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행운의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 남자가 얼마나 배려 깊고,

따뜻하게 대해 줬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여자의 고백과 동시에 서로 포옹을 한다.
마지막, 포옹 장면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두 사람의 키의 차이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전엔 머리 하나 이상이었는데, 머리 반의 차이도 안 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 오른 영화가 두 편 있었다.
하나는 "길"이란 영화다.
잠파노의 안소니 퀸, 젤소미나( 배우는 깜박...)가 나왔던 "길".
"길"엔 가슴 속 깊은 곳을 침투해서 긴 여운을 남기는 노래가 있는
것 처럼, 여기 이 영화엔 언젠가 나왔던 트위스트 곡(?)이 있다.
혹시 이 영화의 감독이 젤소미나를 죽음에 몰아 넣은 잠파노의 아픔을
풀어 주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또 하나는 쉰들러 리스트라는 가짜 흑백영화 장면이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알 것이니 재론하지 않겠다.

좋은 영화 만나기가 참 힘들다.
물론 오직 주관적인 나 만의 생각이지만......

백만 달러 베이비를 보고서...

흔한 생각과 취미 2005. 4. 13. 18:49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는 게 고통일 뿐 이다.

끝장내 주세요.

거절하니 혀를 두 번 깨물어 자살을 시도 한다.

결국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도 반송된 것을 보고는

매기에게 모크슈라의 뜻을 알려 주고 키스한다.

그리고 생명 유지 장치를 떼고 진정제를 주사 한다.

"모크슈라는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 이라며...

"나의 소중한 혈육" 으로 가르치고 돌봐 주고, "자기 보호" 를 그렇게

강조한 셈이다.

또, 모크슈라 이기 때문에 죽음을 선사 한다는 의미일까?

나는 여기서 예수가 숨 넘어갈 때 한 마지막 말,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가 생각난다.

사랑이란 단어가 거의 쓰이지 않는 영화가 또 있었을까?

"섹스"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 미국 영화가 얼마나 될까?

아니 전 세계를 통털어서 얼마나 될까?

스토리가 진행되면 될 수록 잠이 깼다.

환절기 불면 습관으로 인한 눈 뻑뻑함을 달래려 왔지만, 점점 더 따가워 졌다.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호기심과 기대로 잠이 달아난다.

70이 넘었을 듯한 할아버지

이제 서른 초반의 여자 복서....

이 영화에서 "남녀 간사랑" 은 상상되는 것 조차 불안할 정도로 "욕구"가 없다.

그러나 "부녀 간 같은 사랑", " 좋은 친구" 라는 울타리로 넣기는 뭔가 싱겁다.

그래서 나는 부녀 보다도 더 진하고, 친구 보다 더 깊은 이성 간의 사랑을

그리려 한 것 아닐까 라는 고급스러운 생각에 흥분하게 되었다.

즉, "새로운 형태의 사랑" 을 제기한,

굉장히 뛰어난 영화를 보는 것인가 라는 기대가 크게 들었다.

어쩌면, 상대의 존재 자체만으로 기쁘고 편하고 행복한, 더 할 나위도 없이 좋은 것,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랑,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랑,

그냥 "있기만 한 것" 으로 모든 것이 다 좋은, 다 해결되는 형태를 그렸나.....

나름대로 "기대하는 결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기 호흡이 불가능한 전신불수의 매기가 다리를 절단하고 나서는

프랭키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할 때 부터 나는 이제 속는 일만 남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 하였다.

프랭키가 23년 동안 주일 마다 빠지지 않은 성당의 신부하고의 대화...

그냥 흔하디 흔한 "안락사 논쟁" 과 "제공자의 고뇌" 로 가고 말았다.

결국 "안락사 긍정" 쪽으로 귀결 되는 그런 영화가 되고 말았다.

너무 사랑하기에 죽이고 마는 안락사 영화......

프랭키에 대한 책임 추궁, 수사 등에 대한 후일담은 하나도 없이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남으로써 "안락사 제공자" 도 긍정하는 것 같다.

"사라짐"은 또 하나의 "죽음" 아닌가.

"죽임으로써" "죽는"..........

새로운 화두가 주어졌었지만 "안락사 논쟁"으로 끌려 간 듯 하여 너무 허전하다.

내가 속물이라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