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 놓는 휴대전화 단상...

기본카테고리 2010. 1. 11. 18:25

휴대전화가 오면 발송자 번호가 표시되기 시작하면서 드는 생각이 몇 가지 있다.

전화를 바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도 나중에 전화를 할 수 있다는 점,

바로 받기 싫은 전화라면 안 받을 수 있다는 점,

나중에라도 전화하는 시점을 본인이 알아서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아예 무시할 수도 있다는 점......

그러나 나는 아예 무시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반대로 내가 거는 전화 역시 상대방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화나 문자를 보냈을 때 바로 답신이 안 오면 '못'하는 것이거나 '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화나 문자를 세 번 정도 했어도 답이 없다는 것은 '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기피하고 있다는 것으로...

내가 가깝게 지내기도 하는 후배 하나는 전화기를 꺼 놓을 때가 종종 있다.

전 날에 술을 많이 마셔서 일어나기 힘들거나 일을 바로 하기 힘들 때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무시할 수도 있는 전화 자체는 미리 회피하는 것 같다.

그 전 날 서로 중요한 의논을 하면서 하회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데도 다음 날 전화를 하면 꺼 놓고 받지를 않는다.

이 쪽에선 중요하지만 저 쪽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있다는 증좌인 셈이다.

거꾸로 저 쪽에서 꼭 필요하여 전화 하였을 때 이 쪽에서 꺼 놓고 있다 해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리라.

그러하니 이런 사람과는 중요한 대사를 같이 하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저쪽에서도 중요한 것이 없고, 이쪽의 생각이 크게 급하거나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상황이 되풀이 된다는 것은 집중성, 진정성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2010.1.11>

맘에 와 닿은 김기덕론 [펌]

기본카테고리 2010. 1. 5. 11:41

점점 더 근원을 향해 가는 김기덕

: 대놓고 무식하다는 김기덕에 대한 옹호


Affiche%20ADresseInconnueP.jpg김기덕의 가장 최근작인 <비몽>을 보지 못했다. 그것을 제외한 김기덕의 모든 영화를 그 동안 보아오면서 그에 대한 많은 비판, 비난에 가까운 목소리를 많이 접했다. 아마 흥행도 안되면서 그처럼 욕을 많이 먹는 감독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가끔은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용기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의 초기작(<야생동물 보호구역>, <악어>)들은 주목할 만한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논란이 될 만한 지나친 가학성이 물론 존재한다. 인간 내면의 ‘불편한 진실’을 뻔뻔하게 보여준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절대 거룩하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잡스럽고 역겹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기에 고상한 위선자들은 은밀하고 퇴폐적인 자신들의 다른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하고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더구나 그 역겨운 영화가 해외로 자꾸 불려나가고 상도 받는다고 하니 더욱 참을 수 없겠지. 그다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닌, 세련되게 말 하지도 못해서 오히려 더욱 대중을 분노케하는 그가 자신들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 같아 펄쩍 뛰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대놓고 무식한’ 김기덕이라고. 그가 무식한 사람으로 정의되어야 자신의 위선이 성스러워지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의심한다. 나는 그가 위선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그의 위험한 행동을 변호할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계속해서 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영화들이 모두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에서 공통된 성향을 보이고 있지만 김기덕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박찬욱의 영화처럼 아예 하나의 주제를 시리즈처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며 임권택처럼끊임없이 같은소재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이명세처럼 일관된 형식적 미장센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홍상수처럼 늘 같은 화법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다른 그 "무엇"이 계속해서 그의 영화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의 영화들은 모두 하나의형제다. 제 각각 다른 듯이 보이는데 결국은 모두같은 모태를 두고 서로를 이해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김기덕의 영화를 이해하려면 그의 전작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되새겨야 한다.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의 영화를 계속 찾도록 만드는 매력이다.

1. <> 에서 보여준 ‘삶’

감독 : 김기덕
출연 : 장첸, 지아, 하정우
2007, 84, 한국

F4922-19.jpg<나쁜남자>에 이르기까지는 나는 그를 그다지 유쾌한 감독으로 여기지 않았었다. <파란대문> <>, <수취인불명>, <실제상황>, <나쁜남자>, <해안선>에서 계속되던 가학성은(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을 동반한)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그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폭력과 강간과 불편한 자학이 존재하는 이 영화를보면서 눈을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뭘까.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런데 한 인터뷰를 통해 김기덕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다소 해결해줬다. 그는이같은 말을 했다. "낮과 밤이 합쳐져서 하루가 되는 것처럼 선과 악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그렇다면 김기덕은 밤을 찾아가는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어떤 희망이나 빛을 느끼기는 힘들었다.너무나 냉정하고 처절하고 비참하기만했으며 언제나 극으로 치닿는 상황을 보여주었다.그런데 그것이오히려더욱 진실되게 느껴졌다. 세상이 언제나 아름다운 빛으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영화는 우리가 바라는 어떠한 희망과 이상을 심어줄 필요도 있지만미처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저 구석의 추한 모습까지 파헤쳐 보여줄 필요도 있다. 그는 지금까지 주로 그랬다. 그런데 <>을 보면서 그에게 커다란 변화의 조짐을 읽었다.

1) 다시 한번 진화하는 김기덕
이미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 봄>을 기점으로 그의 영화는 SSFW_04.jpg크게변화했다. 그는 좀 더 완화된 화법을 구사했으며 더 차분해졌다. 그런데그에 따라 배우들의 입은 점점 더 닫혀갔다.김기덕의 영화 속에 주인공들은 유난히도 말을 안하는 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 "그리고"은 거의 말이 없이 진행되었다. 물론그 이전에 만들어졌던<나쁜남자>한기는 아예 벙어리였다. 그리고 그 이후 <빈집>의 두 남녀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이 없다. <사마리아>의 재영도 역시 거의 말이 없으며 죽는 순간에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는다. <>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시간>에서는 꽤나 말이 많은 편이었다. <>도 역시 죄수 장진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을 자해해서 말을 못하는 설정을 만들고 말았다. 감독이 이들의 말을 닫아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이들이 말을 닫아가는 것과 동시에 이전에 보여주었던 자극적인 가학성은 점차 줄어들고 그는 점점 구원에 대한 고민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로 인해 숱하게 문제가 되었던 여성에 대한 폭력의 담론도 사그라들었다. 김기덕은 점점 모든 요소를 지워버리고 가장 근본적인 것만 남겨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변화하는 김기덕의 남자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남자인물이다. 여전히그의 영화 속의 남자들은 세상에 대한 분노, 혹은 가슴속의울분, 적개심 등을 가지고있다.그리고 그것을 가학적인 방법으로 표출시킨다. 그래서 유난히도 범죄, 죄수와 형사, 감옥이 자주 등장한다.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나쁜남자, 실제상황, 해안선, 사마리아, 빈집, 그리고 에 등장하는 남자는 모두 범죄자이거나 범죄자가되고 만다.) 이번 <>의 주인공도 역시 감옥 밖을 한발작도 나갈 수 없는 사형수이다. 그리고 그의 범죄 또한 끔찍하다. 부인과 자식을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른 자다.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않는데, 여기서 장진이그 동안 다른 남자와 차이가 있다면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변화를 가진다는 것이다. 대부분 변화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극단으로 치닿는 경우였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의 아버지는 그저 딸을 사랑하는 한 남자였지만 살인자가 되었고, <해안선>의 장동건도선하고 평범하던 한 남자가사회에 의해 폭력을 배우고극악해졌다. 그러나 장진은 이들과 다르게반복적으로 자해를 하던 인물에서 다른 Affiche.jpg사람을 포옹하는 사람으로 변화했다.

처음 그는자신의 생명을 끝없이 붙들려고 하는, 그리고 죽음이 무엇인지 느껴보고자 하는 집착자였다. 우리의 숨을, 우리의 삶을 놓고 싶어하지 않는 그 심정을 스스로를 자해하는 것으로 표출했다. 그의 계속되는 자살에 대한 의도를 읽는 사람은 바로 주연뿐인데,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이 경험한 "숨이 끊어진" 느낌을통해 죽음의 문턱을느껴보았다. 그리고 그때느꼈던 공포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장진에게 전달해준다. "그리 나쁘지 않아요" 그에게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친절한 메세지를 전하러 온 것이다. 이번 영화의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기덕의 남자들은 담담해졌고 화해를 배우고 있으며 사랑을 시작한다. 물론 장진도자해를 거듭하는 행위를 통해 여전히 가학성을 보여주고 있지만매번 그런 그를 구원하러 주연이 달려오지 않는가. 이것이 다른 점이다.세상의 밑바닥에서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인생이 아닌 누군가의 "걱정"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장진의 감옥 동료가 보여주는 행동에서 더욱 확실하게 나타난다. 계속해서장진을 괴롭히는 듯이 보였던 젊은 죄수는 결국 장진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주연을 만나러 가는 장진을 막기 위해,어린죄수는 계속 주연의 흔적을 지우려 했으며 결국장진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줌으로써 둘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 근원에 대한 탐구
언제나 영화의 제목에 충실한작품을 만드는 김기덕의 영화는 점점 추상적 존재를향해 가고 있다. 그가 <시간>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때 어떻게 시간을 보여줄 것인지 너무 궁금했었다.<빈집>에서 "공간"의 개념을 통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않는 세계에 대한 화두를 던졌고,<>에 이르러 "시간"의 개념이 살짝 드러나더니(달력을 넘겨 가짜로 시간을 흘러 보내는 행동)기어코 진짜"시간"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는 진짜 "시간"을 보여주었다.그렇다면 "", 숨은 또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역시 <>에는 ""을 보여줬다. 죄수 장진은 끊임없이 자신의 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나 그가 그의 숨을 끊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생명에 대한 새로운 애착이 찾아온다. 어쩌면 그가 계속해서 숨을 끊으려 하는 행위는 자신의숨을 느끼려는 또 다른 방법이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로써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자신의 숨을 간절하게 붙들기 위한극한의 행동인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이 ""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숨을 멈추는 것이다.그렇기에 주연은 점점 그에게 사랑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에게숨이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 때 그녀를 결국 밀쳐내고야 마는 장진의 행동을 통해 그에게 숨의 가치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었다.이제 그녀는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것을 털어낸 듯이 그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시간과 공간, 그리고인간 생명의 근원을 점차적으로 보여주며 김기덕은 점점 삶과 죽음, 인생의 근원을 향해 가고 있다.



2) 고통과 희망의 '순환, 반복'

P15171576163391.jpg<, 여름 가을 겨울..>에서 순환과 반복의 구도는 고스란히 전해졌었다. 그런데 <>에서 다시 한번 이 순환이 등장한다. 장진의 면회를 가는 주연은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에 이르렀으며 장진과의 관계도 단계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이번 <>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영화 중 또 다른 기점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이 등장하는 그의 영화가 있었던가. 물론 늘 가족이 등장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 가족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거나 구성원이 하나씩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말하는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하정우와 딸의 눈싸움 장면, 그리고 마지막 그들이 차 안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 모습은 한 차례 폭풍이 끝나고 고요를 찾은 모습처럼 보인다. 그 동안 어둠을 파헤치던 김기덕이 점차 빛을 감싸안은 듯이 보인다. 더구나 여자의 행동에 대해 그녀를탓하기보다 자신의 외도와 무관심을 깨닫고 가정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모습에서 더욱 그렇다.결국 겨울이 되었을 때는 아이와 함께 주연을직접 교도소까지 데려다 주고 함께 돌아오는 것은모든 것의 화해와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장진, 주연, 그녀의 남편은 모두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전에주연이 의도적으로 빨래를 두 번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오는데,모두 흰 셔츠였다.처음 흰 셔츠는 바닥에 떨어져 흙이 묻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나 두 번째 떨어뜨렸을 때는 다시 가져가빨아 버린다.남편의 행동에 대한 그녀의 심경의 변화를 읽을 수있는 모습이다. 더럽게 때가 묻은 것을 지워버리고 용서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기덕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동하며, 또한 이것을 반복하며 그 동안의 질문에 답을 만들어가고 있다. <시간>에서도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그냥 가버렸다. 그러나 <>은 다르다.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나씩꺼내었다.. 그것은 들숨과 날숨이 합쳐서 하나의 숨이 되며 그것이 곧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 이것은 모두 합쳐졌을 때 비로소 완성된 삶이 되는 것이다.
Gala.............[한겨레 2010.1.3일의 블로그 '빵과 장미' 에서]

103 년 만의 서울 폭설

기본카테고리 2010. 1. 4. 22:46






아내가 새벽기도를 가고 나서 얼마쯤인가 지났을까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갔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 바깥을 내다 보니 마당에 눈이 내리며 제법 소복하게 쌓였다.그리고 계단은 물론이고 현관문 앞까지 하얀 눈이 쫙 깔려 있다. 문을 닫고 창으로 바깥을 보니 눈이 꽤나 많이 올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까지 함박눈이 쏟아지듯, 가루눈이 얌전하게 뿌리듯이 오면서 소복소복 쌓여 15 센티 이상 쌓인 것 같다.

이렇게 감나무 둥치에 눈이 쌓인 것은 두 번째에 불과한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집 마당은 잔디이니 저 정도로 쌓인 눈이라면 꽤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 되어 미리부터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아예 차를 갖고 나가지 않기로 하였다.

대신 양말 두 켤레와 함께 등산화를 신는 등 중무장을 하고 나갔다.

대통령이 새해 시정연설 하는 날인데 유래 없는 대폭설 사태에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하여 상대적으로 빛이 바래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017,7018,7021 번 버스를 타고 새절역에서 6 호선을 탄다.

합정역에서 2 호선으로 갈아 타고 신도림역에서 연장선을 타고 신정네거리역에서 내린다.

신정네거리역에서 버스로 두 정류장을 가면 끝이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



도로에서 한의원 출입구 까지의 통로에 눈이 가득하다.

1 층 가구점에서 한 번 쓸었다 하는데 눈이 너무 쌓여서 나중에 치우려면 보통 힘들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 시간 반을 눈 치우는데에 열중하다 보니 온 몸이 땀에 푹 젖는다.

들어와서 거울을 보니 꼭 찜질방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얼굴이 뻘겋다.

<2010.1.4>


새해 첫 예배 단상과 눈 덮인 파주 공릉 저수지

기본카테고리 2010. 1. 4. 22:24

올해 첫 예배를 처남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에서 드렸다.

설교대 앞에 하얀 천으로 덮은 성찬 떡과 성찬 포도주가 꼭 예수님을 덮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안 좋았던데다가,

성찬예배를 통하여 사람들을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언제부턴가 성찬예배가 영 부담이 생겨 난 참여 안 한다.

어떤 장로님이 대표기도를 하면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이제는 정말 교회가 기업화 하는 것이 보편화 하였구나 하는 생각에서 씁쓰름했다.

교회 성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 죄인들을 예수님을 믿게 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라고 웅변하겠지만,

이는 과정 상의 선과 의를 도외시한 교회 이기주의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지극히 작은 소자에 대한 긍휼과 자비를 위한 행위를 평시에 꾸준히 하지 않고 경시 간과하면서 도대체 무엇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높일 것인가.....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 결코 성전이 아닌 교회라는 이름의 기업체 사옥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인지......

유럽 중세에 로마 교황청이 건물 지을 자금 마련을 위하여 면죄부까지 발부하다가 종교개혁을 맞은 것 아닌가.

많은 한국 교회의 화려한 건물 짓기는 자기 과시요 자교회 이기주의 외에 무엇이 있을까.

다 하나님 앞에 티끌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용산참사를 당한 장로 집사 가족과 재개발조합대표 장로가 같은 교회에 다녔는데 참사가족은 교회에서 한 번도 예배를 못 본채 통곡하고 외로워 할 때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누구의 편이었는가?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무엇을 했을까....

숙제다.




내가 겨울엔 꼭 겪고 싶은 것이 몇 개 있다.

꽝꽝 언 저수지나 강 위를 걸어 보고 싶기도 하고 무지 추운 철원이나 한탄강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큰 소나무에 쌓인 눈을 보고 싶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엄청 쏟아지는 광경이다.

올해엔 철원도 영하 30도 가까이 떨어지진 않아서 아직 안 가봤고, 겨울 한탄강 절벽 경치도 못 봤지만 드디어 꽝꽝 언 저수지를 걸어 보고 큰 대자로 누워 보게 되었다.

깊게 언 저수지는 백령도에서 경석이가 근무할 때 면회를 가서 걸어 봤기 때문에 이제 언 저수지를 보면 그 때가 생각이 난다.

"사람들에게 나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 보았다, 한강을 걸어서 걸었다" 라고 이야기 하면 농담하는 줄을 알지 그 내막을 자세히는 몰라 하기 때문에 겨울 언 강을 걸어서 건넜음을 알려 주면 그제서야 수긍한다.

꽝꽝 언 강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갈라져서 틈이 제법 넓은 곳을 보게도 되고, 쩡쩡 소리가 나며 무섭기도 하고 호기심이 커져서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조심하기도 한다.

몇 년 전 분원리 앞에서 건너편 팔당 쪽으로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얼지 않고 물이 흐르는 곳과 큰 성에가 겹쳐서 솟아 오른 곳을 보았는데 저 곳이 한강 줄기의 눈이 아닌가, 숨 구멍이 아닌가 싶어서 오싹해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저 곳에서 잘 빠져 목숨을 잃지 않았을까, 저 곳이 물귀신이 발을 잡아 당기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예배를 드리고 파주 기도원에 장인 묘소를 성묘 가면서 가는 길에 공릉유원지를 들러서 언 저수지를 보기로 하였다.

예전엔 동네 앞의 좁은 길을 통하여 저수지 옆을 지났는데 저수지에 가까운 곳에 큰 길을 뚫어 참 편했다.

한 눈에 하얗게 눈으로 덮인 저수지에 썰매를 타는 사람들이 보인다.

순간에 가슴이 탁 트이면서 저절로 뛰기 시작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같이 저수지로 들어가니 상상도 할 수 없게 두껍게 얼었다.

한 아버지가 사륜오토바이 뒤에 자녀들을 끌면서 다닐 정도로 탄탄하다.

저수지 중간까지 걸어 가면서 눈 덮인 저수지를 한껏 감상한다.

아! 정말 좋다.

건너편 야산 사면의 경치가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 없다.

상류로 널리 쫙 펼쳐진 설원.....

이렇게 평평한 설원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물이 언 저수지 위의 설원이 아니라면 이렇게 편편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진을 큰 대자로 누워서 찍고 서서 찍고 한참을 즐겼다.

<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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